이개인은 1972년 데뷔하여 개성 있는 연기로 인기를 얻으며,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미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해 철없는 중년의 아저씨 캐릭터로 대중들에게는 친숙한 배우입니다. 그러나 전신마비 진단으로 인해 어느 순간 방송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강아지 밥 주러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후 1년 반 동안 방송에 출연하지 않아 수입이 감소했는데, 이전에 돌아가신 김무생 선배님은 "너 또 술 먹었구나. 너 나이 먹어서 후회한다.
몸 평 들고 돈 없으면 얼굴은 알려져 있는데 어떡할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시청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큰 사랑을 받았던 그가 이제는 아플수록 지쳐가며 연기할 수 있는 모든 용기와 힘을 잃어, 파란만장한 삶을 더 이상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계인은 1952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 꿈을 키웠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에 소속되어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어떤 사정으로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의 데뷔는 1972년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서 150대의 일에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뒤, 당대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의 먼저 투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수사반장에서 살인자나 범인 등 악역전문 배우로 실감나는 연기를 펼쳤고, 데뷔하자마자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인 시절은 안방극장과 영화판에서 모두 승승장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들과 두루두루 상대할 정도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계인의 전성기를 함께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는 주연을 맡은 '내가 버린 여자'라는 영화로 1970년대 최고 흥행 영화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해. 그리고 그때의 이계인씨는 "내가 제일 잘나갔어!" 라며 자신감 넘치게 살았다고 해.
1977년에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당신으로 탤런트 입문'에서 조연상까지 거머쥐면서 인기에 도취돼서 용기도 쉽게 내고, 영화 '로키'의 버금가는 할리우드 권투 출연자의까지 받게 되면서 그의 거만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대. 그래서 방송 리허설에도 몇 시간씩 늦게 참석하는 일도 생겼다고 해.
이 친구, 참석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안 되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연출자와 선배 연기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게 되었지. 거만하거든. 그래서 작품 출연 논의는 다 무산됐고, 심지어 영화 김득구도 흥행 실패하면서 인기와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졌어.
그 때는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거의 4년을 백수로 살게 됐지. 그래도 이때 쓰던 가락이 있어서 차는 꼭 굴려야 했고, 외출할 때도 얼굴이 알려진 만큼 아무거나 걸치고 나갈 수 없었어. 그래서 늦은 나이에 부모님께 손을 벌려 용돈을 받았지.
불효 아닌 부려도 참 많이 저지른 것 같지만, 그런 때도 있었지요. 이전에는 잘 나갔던 배우가 어느 순간부터 떨어지기 시작하면 망가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이 있죠. 이런 상황을 구원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수현 작가였습니다.
당시 한국 드라마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사랑과 야망"에서 그를 다시 불러주었고, 이를 계기로 "전원일기"에서 너무 아빠와 종명됐다가 다시 부활한 수사반장의 재차 출연하면서 마침내 그가 배우로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예전에 주인공만 하던 이계인의 이미지는 좀 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홀어머니의 마누라는 도망가고 툭하면 교도소 가는 수사반장의 범인 혹은 "전원일기"에서 불쌍한 노마 아빠로 기억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그의 어머니는, 잘 나갔던 신인 시절과 달리 유난히도 악역만을 전전하는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 나중에 너가 진짜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냐며 늘 장독대에 물을 떠 놓고, 우리 아들이 이제는 좋은 역할인 의사, 판검사, 검사 맞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주에 드라마에서는 흉악범 사형수와 같은 역할로 출연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전원일기성 노마 아빠의 홀아비 이미지가 안타까웠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홀아비들이 그에게 다가와 한 잔씩 술을 건네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김장철이 되면 놈아 아빠 어렵게 지낸다고 김치를 담가 보내주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아들을 위해 늘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1992년 세상을 떠나면서 큰 슬픔에 빠진 이계인은 우연한 기회로 첫 번째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 모든 것이 공황상태였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과 마흔이 넘은 나이에 화려하게 결혼식까지 올렸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장모님에게 물어보고, 아는 언니 집에 갔다가 친구 집에도 갔다는 등 계속해서 다른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던 제 조카가 찾아와, 드라마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제 이모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사기결혼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실을 알게 된 후, 제 아내는 결혼 전부터 이미 다른 남자와 10년 넘게 동거를 해왔고, 그 남자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경제적인 이유로 이계인과의 사기 결혼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후, 저는 결국 경찰에 신고를 했고, 추적을 해서 두 사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동거남이 이계인에게 “저 여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다”라며 삭삭하게 말하더군요. 이걸 보고 처벌하기 힘들었던 저는 결국 두 사람을 보내주면서, 제 지옥 같던 결혼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이때, 자신의 이러한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질까 봐 몹시 두려워했었지만, 다행히 과거에는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이슈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3년 후 두 번째 아내를 만나 재혼을 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이 게임 실패하면 큰일날까봐 걱정도 많았고, 재혼 사실을 숨기고 살았어. 그때 두 번째 아내는 그와 재혼해 아들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못가 헤어졌어.
그래도 그 때 유치원생이었던 둘째 아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이혼하면 이 아이가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 많이 고민했었어. 그래서 어렵지만, 전처의 아들을 입양했어. 그리고 아들과 30년간 함께해서, 세상 누구보다 잘 키웠다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내가 결혼을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아들과는 찹쌀떡 같은 인연이야. 그래서 행여라도 우리 아들에게 양자라고 말하면 아들이 운다. 어찌됐든!
내 아들은 존경스러운 쇼트트랙 선수입니다. 그는 내가 키워낸 노력의 결실이며, 대학 졸업까지 함께한 30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은 몸이 아주 건강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가족의 사랑으로 잘 자랐습니다. 아빠로서 그의 성장과 성취를 지켜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73세의 김형자씨가 두 아이를 잃어버리신 것은 매우 비극적이며, 우리는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0) | 2023.05.10 |
---|---|
현미 가수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 2023.05.10 |
조영남의 두 번 이혼, 진짜 이유는? (2) | 2023.05.10 |
아나운서 김동건씨는 KBS 사장과 싸우다가 결국 퇴출될 것인가요? 그의 유서를 쓰고 떠난 진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0) | 2023.05.10 |
배우 이미연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만행을 저지른 남자들 때문입니다. (1) | 2023.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