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모공시절, 아나운서 김동건은 보도본부 망년회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는 KBS 사장도 함께 계셨다. 사장은 김동건 옆에 앉아 술을 따라주며 "아나운서들은 공부를 더 해야 된다"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김동건은 "공부하뜰 해야 하지"라며 말을 받은 후, 술잔을 KBS 사장에게 건넸다.
그런데 사장이 술잔을 비우면서 또 "제발 공부 좀 하시라고" 말하자, 김동건은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 줄 알고 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으니까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사장은 "아나운서들 공부 안 한다"고 시청자 위원회에서 이야기가 나왔다며, 더욱 언성을 높였다. 화가 난 김동건도 말하게 되었다.
"시청자 위원회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KBS 아나운서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천대 일에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아나운서들이 공부 안 한다고 지적한 시청자 위원은 다름아닌…
a씨는 탤런트가 아니었지만, 그 때 김동건은 a씨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장에게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얼마나 공부했는지 아시나요? 만약 서울대 총장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인정할 수 있을까요?" 라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KBS 사장은 김동건에게 손찌검을 했고, 김동건은 방송국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어떠한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지 못했습니다.
김동건은 1938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이 각각 두 분입니다. 친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셨고, 친아버지는...
25살 때 잡혀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을 떠나 형과 함께 고아가 되었는데, 그가 항상 어머니라고 말하는 분은 나와주신 어머니의 언니였습니다. 그들 형제는 호적에 등록되고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어머니는 평생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에 "너도 이제 장가를 가서 가정을 이루었으니까 알아둬야 한다"며 새장에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사진 중 한 장은 친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친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형이 중학교 입학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반해, 이때부터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중학교 때는 좋아하는 아나운서들을 직접 보기 위해 공개방송도 방청하며, 서울정동에 있던 KBS에 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후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희망하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습니다. 대학 방송국에서는 선후배들과 함께 최초로 무선 FM 단파를 사용한 방송국을 만들기도 했고, KBS 입사 시험을 두 번이나 치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동아방송국에서 귀국하게 됩니다. 당시 대학생으로서 KBS 입사 시험에 두 번이나 출전한 경력이 눈여겨졌던 한 사람이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김동건씨는 동아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아나운서가 되는 것을 굉장히 반대했습니다.
어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아나운서는 춥고 배고픈 직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김동건씨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3년만 해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후 동화방송에서 1년 8개월간 일한 후…
갑작스러운 이직으로 tvc에서 tbc로 이직한 후,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tbc에서 뉴스를 주로 다루던 도중 모순이 생겨 사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며 꿈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낙방했던 kbs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kbs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가 생겨 유사장 디푸스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맡겨져 있던 프로그램을 동료에게 부탁하여 대신 진행했고, 이후 그는 다시 프로그램 진행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한테 미안해서 걸음도 잘 못 걷는데 녹화하려고 방송국 갔더니 프로그램 진행자가 이미 친구로 바뀌어 있었어. 아까운 친구 대신 내가 함께 하자고 제안해도 아나운서들의 의리상 그렇게 안 했을 거 같아. 그때 처음으로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느꼈어. 그리고 난 후에는 한동안 너무 힘들었지.
김동건은 예전에 담배를 참 많이 피워서 골초 소리를 들을 정도였어. 그래서 담배와 관련된 이야기가 참 많아. 하루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료화면을 내보내는 시간이 있었는데, 대본에서 자료하면 방영 시간이 4분 50초로 돼 있는 걸 보고 담배 한 대 정도는 충분히 피울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생방송 중에 담배에 불을 붙여버렸어.
그런데 그 순간 자료 화면 필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해 당황한 PD가 진행자인 김동건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나운서가 방송 중에 담배를 피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었습니다. 결국 2일로 시민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이 담배가 아니라 볼펜이라 우겼습니다.
하지만 방송된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누가봐도 연기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방송을 하면서 얼마나 글씨를 열심히 썼으면, 볼펜이 열을 받아서 연기까지 나겠느냐며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이번 방송에서 메인 MC를 맡은 일인데이 때문에, 그는 1985년 무대 진행 MC이자 실향민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예술공연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남북 간에 갈등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떠나기 전 친구에게 유서까지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아무튼 당시 함께 평양을 방문한 문학인으로는 시인 서정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이제 어떡하지 싶어 아찔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당시 북한에서도 서울로 보낸 방문단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우리 방문단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당국이 김동건을 포함한 방문단에 대해 억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협상 끝에 북한 당국은 방문단 사람들을 온유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억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방문단 사람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서울을 방문한 북한 방문단들이 먼저 판문점을 통과하면, 과연 우리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후 무사히 판문점에 도착했는데, 그간 심각했던 분위기와 달리, 당시 판문점의 분위기는, 남측 언론사 기자들이 북측 지역까지 넘어와서 취재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단 사람들은 너무 무서웠는지요.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남쪽 지역으로 넘어갔고, 예술단원으로 함께 갔던 어린 친구들 가운데는 남측으로 넘어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돌아온 후에도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국민 아나운서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특히 가요무대는 18년간 진행을 이어하며 김동건이 가요무대고 가요무대가 김동건이라고 불릴만큼 그에게 있어 가요무대는 가장 특별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 4개월이 지났을 때, 여느 때처럼 방송 녹화를 끝내고 대기실로 왔는데 평소 보수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담당 국장이 그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다음 주부터 진행자가 교체되니 나오지 말라"는 황당한 퇴출 선고를 받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통보를 받게 된 그가 당시 통보한 사람에게 말하게 "내가 오래 했으니까 언제든지 그만 국가고는 되어 있지만, 그래도 20년 가까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사람이 시청자들에게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갑자기 다리가 부러졌냐.”
사고가 있었는지 안 했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했나요? 통보한 분은 땀을 흘리며 당황해 하실 겁니다. 18년간 계속 진행하던 프로에서 하루 아침에 하차한 그는 속상한 마음에 전화기를 끊고 부산으로 향했으며, 며칠이 지나도록 방송국에서 연락이 없어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중에 방송국에서 감사패를 받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에게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방송국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김동광씨는 방송 생활 60년 동안 개인 책상을 가져본 적도, 결제 서류에 도장을 찍어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반골비 질이 누구보다 강해서, 예전에 KBS 사장 중 한 분이 타격기를 설치해 직원들의 출근을 체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 역시 너무 불쾌해서 사장이 설치한 타갑기에 출석체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사장은 직원들이 찍는 걸 감시하고, 나는 계속해서 찍지 않았다. 심지어 사장이 앞에 있으면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북한에서 연혁 무기라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이 KBS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사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는지 그 날은 휴일이었다.
물론 이북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다시 타격기를 설치하긴 했지만, 출근 체크하기가 싫어졌다. 또 다른 일로는 예전에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만난 담당 pd가 있는데, 그때는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pd가 참여정부 때 KBS 사장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이후 KBS를 나가고 책을 냈는데, 출판기념 사회를 맡아달라고 하면서 내게 연락을 했다.
나는 좋게 받아들여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KBS 직원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데, 내가 이 pd의 출판 기념 사회를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모공" 때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생각에, "군사정보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겠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동건은 고백했다. "어떤 방송이든, 사회자는 프로그램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사회자를 거의 의식하지 못할 때, 그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의 역할은 출연자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질문을 준비하는 것보다, 열심히 들어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면, 벙어리도 말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덕목은 겸손함과 솔직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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