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은 1968년 23살이었을 때 19살의 윤여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5년간 이물 없는 오빠 동생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조영남이 군대를 제대한 후,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실, 결혼할 무렵 윤여정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여배우로, 장희빈, 민비, 환여 등에서 신들린 연기로 대종상과 청룡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조영남과 윤여정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에 걸친 결혼 생활 동안,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랄만큼 수많은 미녀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국, 조영남은 새로운 사랑인 백은실을 만나 윤여정과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조영남이 고백하기로는 본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못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애들이 한참 어릴 때 집을 나온 것이고 또 하나는 윤여정과 이혼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영남은 1945년 해방동이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사용할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사우테 때 피난 행렬에 섞여 38선 이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장난을 좋아하던 조영남은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가을이면 친구들끼리 누가 밤길을 더 많이 걷는지 대결을 하거나, 최신 사탕이라 속여 동네 아이들을 속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행한 장난들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조영남에게 화투 놀이를 가르치며 골 때리는 행위를 해서 조영남과 동생들은 체계적으로 장난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시범으로 보여주며 가르쳐 주었던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 당시 빨랫비누 대용으로 사용하던 양잿물을 시장에서 판다는 것처럼 만들어 길목에 뿌려놓고 부자가 판자 울타리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이게 뭔가요? 라며 슬쩍슬쩍 사방을 둘러보며 집어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달걀 한 꾸러미를 훔쳐서 도망가던 사람을 장마당까지 쫓아가다가 실수로 쓰러졌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길로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고 그렇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에는 예전에 없던 일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이후로는 어머니가 가슴 고생을 하며 삼남 인연을 키우게 되었는데, 그래서 당시 어머니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했던 일이 가짜골 만들기로, 사계절 내내 주걱을 저며 가짜골을 만들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한편, 당시 어머니는 교회에서 최고 벌로 권사님이셨습니다.
만들 때도 입에서는 찬송가와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권사님의 신분으로 이런 피양심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어린 조영남의 시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굿에는 어떻게 그런 일을 했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안 하면 방세도 못 내는데 어떡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쓰러지고 몇 년 후 조영남은 안방으로 건너가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린 마음에도 소변 썩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입니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조영남의 집은 1년 내내 소변 냄새로 찌들어갔습니다. 심지어 깡통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 대지 못해 깡통 안팎엔 초록색 같은 객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풍겨나오는 냄새가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왼쪽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 신체 불구자였는데도 정신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멀쩡했고, 언어에도 아무런 장애가 없어 말도 큰 불편 없이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린 아들에게 영남아, 아빠가 이렇게 누워 있다고 너까지 기죽으면 안 된다고 꿋꿋하게 당부해줄 법도 한데,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당부의 말이나 구지구지한 말은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그 자식이라고 조영남 역시 당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보내던 그가 방학 때 잠시 내려오면 아버지가 반가울 만도 한데, 서울 생활이 어떻고 누구 집에 얹혀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들을 유철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대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방학이 돼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아버지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래서 훗날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얼굴 빛깔만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건, 당시 반 심볼수인 아버지의 유일 작품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넷째 아들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는 뚜렷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는 10년을 넘게 누워 계시다가,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오로지 성경 한 권과 오줌 깡통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어느 겨울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 부르셨던 분께서는 고등학교 때 전국 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셨고, 이로 인해 한양대 음대 특채 입학생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한양대 2학년 때 음대 신입생 여자 중 한 명에게 마음을 빼았겨 자퇴를 하게 되셨습니다.
그 여자가 너무너무 예뻤기 때문입니다. 이후, 매일 그 여자를 의식하며 몰래 지켜보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그 여자가 조영남님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멋지다며 먼저 다가와서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당시 약혼자가 있었고, 결국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데이트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약혼자가 학교로 찾아와 단판을 내려고 했지만, 조영남님은 무서울 게 없어 차분해졌습니다.
조영남은 약속 장소인 공터로 갔다. 약혼자는 멀리서 보였다. 조영남은 무서울 게 없었기 때문에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가갔다. 그러나 그 순간, 조영남의 다리가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팔로 아무리 눌러도 다리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약혼자 앞에 겨우 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조영남의 다리가 타타 구두 뒤축 바닥을 치는 소리가 엄청 심해졌다. 약혼자는 조영남의 모습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서며 이후로는 연락이 끊어졌다. 결국, 이 사건 이후 한양대 교무처장이 조영남을 불러들여 음대 특차 입학생이자 전액 남학생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냐며 당장 연애를 그만두고 잘못을 빌어라고 했다.
하지만 조영남은 학교와 사랑 중에 겁도 없이 사랑을 선택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영남은 이후 더 열심히 공부해서 1964년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서울대 음대에 들어가니 돈 많은 부잣집 딸들과 예쁜 여자들이 있었다.
너무 많아 놀랍게도, 사랑했던 한양대 그 여자를 서울대 성악과 선배에게 소개시켜주게 됩니다. 결국 그 여자는 선배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나중에 우연한 자리에서 한양대 그 여자의 친동생으로부터 수식을 들었는데, 언니는 선배와 이혼하고 외국인과 재혼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쨌든 조영남은 다시 돌아와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명동새 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들과 첫 결혼 상대자가 된 배우 윤여정도 만나게 됩니다. 조영남은 당대 엘리트들과 어울리며 아쉬울 것 없는 청춘을 보내고 있었고, 그러다 번안곡 '딜라일라'를 발표했는데, 이게 완전히 인기를 얻으며 이웃 대학생 신분으로 외제차에 운전석까지 둘 정도로 엄청나게 잘 나가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범죄자 신세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당시 조영남은 군대에 가기 싫어서, 이유 없이 3년째 군입대를 연기해 놓고 있었습니다.
시민회관에서 김시스터즈 귀국 공연에 초대된 나는 금 MC를 맡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어 무대에 나서자 요란한 박수가 쏟아지며 "신고산 타령"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위해 통기타를 들고 무대로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며칠 전 TV에서 본 와우 아파트 붕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노래의 반주가 시작되자 함흥차를 타고 떠나는 소리를 가사로 불러야 하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아파트 붕괴 모습이 떠올라서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떠올리며 노래를 다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는 조영남 씨가 그저 재밌게 불러 박수 한번 받아보자고 한 노래였는데, 시국이 그렇게 심각했기 때문에 이번 일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방송국 행사 담당자와 조영남 씨의 매니저가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야, 영남아. 무조건 도망가. 어서 자리를 비워라!"고 말했다.
서울시청은 조영남을 당장 조사하도록 요청했지만, 조영남은 끝내 어떻게 될 지 모를 상황에서 이태형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태형 변호사는 조영남이 와우 아파트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 단순한 실수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영남은 군입대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태형 변호사의 노력 덕분에 조영남은 군에서도 군행사 단골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육군 법무 참모장의 요청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지만 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별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놀랍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무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조금 당황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고, 재빨리 머리를 돌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영광에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민족의 역사와 애완이 담긴 각설이 타령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여, 원래 부르려고 했던 노래를 포기하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래 가사를 개사하게 되는데, 와우 아파트 타령을 한번 잘못 불러서, 군대까지 끌려왔습니다. 이에, 지켜보던 6분 참모장이 무대로 올라와, 조영남에게 박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부르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조영남은 각설이 타령을 뚝 그치고, 황성옛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항상 예토의 밤이 되니만세 번 연고프 부르다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에, 조영남은 퇴장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조영남은 세 가지 혐의점에 대한 신문을 받게 됩니다. 첫 번째,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3번이나 거부했던 이유, 두 번째,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을 왜 불렀는지, 세 번째,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입니다. 이에 대한 조영남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조영남은 정치적인 색채를 띤 가수로 인식되며, 이미지가 손상되게 됩니다.
결국 퇴장당하면서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다음날 6분 법무검실로 이송된 조영남은 세 가지 혐의점에 대한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왜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3번이나 거부했는지, 두 번째는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은 왜 불렀는지, 그리고 세 번째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누구를 말하는지였습니다.
결국 조영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만다행으로 법무관실에 근무하던 서울대 동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게 되는데, "저 친구는 정치색이 없다. 그저 똥 된장도 못 가리는 한심한 성격일 뿐이다"라는 말로 글을 적극 변호하는 덕분에 겨우 풀려나면서, 이후 조영남은 제법 생각이 깊은 가수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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