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만남에서는 많은 양이 남는 경우도 많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은 그야말로 철저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 살아가는 것은 부모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고 먹고 입는 것까지 부모님의 덕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성장할 때마다 조언과 도움을 주며, 자식이 어려울 때에도 흔쾌히 도와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계산하면, 부모님의 은혜는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부모님께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가족관계가 원래대로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세미민턴 역시, 한때는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차라리 자신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에 입에 담지도 못할 상처 가득한 말들로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세미민턴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고,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샘 해밍턴은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의 인생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1977년에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식당을 운영하셨고 어머니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가 TV 프로듀서로 성장해 상당히 영향력 있는 유명 PD가 되었습니다. 샘 해밍턴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마이클 잭슨처럼 파마를 하거나 친구 집에 갈 때는 피터팬이나 로빈후드 복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끼가 많았던 그는 어머니가 방송계 종사자여서 출연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었습니다. 6살 때부터 이미 호주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방송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는 방과 후 세인트 마틴스 극장에서 연기 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가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7살 때부터 별거를 하다 10살 때 이혼을 하셨습니다. 이혼의 사유로는 샘이 나이가 어느 정도 돼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나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어머니도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때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느 날 분노에 찬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렇게 우리를 대하는 거죠?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어린 시절의 감정이 담긴 말들을 써서 보냈습니다.
이후 일상 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자신도 남자를 좋아하는가 하는 생각에 미쳐 버릴 것 같았고, 몇 달 동안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샘은 남자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증오하며 어머니와 둘이 살았습니다. 이 아픔을 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샘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국제무역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전공으로 아시아 언어 하나를 배우고 싶었는데, 당시 선택 가능한 언어는 일본어, 베트남어, 한국어였습니다. 훗날 그가 고백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나머지 세계 나라는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지도상에서도 잘 모르는 곳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었고, 한국어를 배우면 이력서에 "한국어 가능합니다"라고 쓸 수 있어 면접에 좀 더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한국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98년 고려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상했던 한국의 이미지와 달리,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산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계속 생활하면서 점차 적응하게 되어, 단 일주일 만에 한국에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당시 룸메이트였던 영국인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홍대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등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성적이 매우 나빠져 교환학생 자격 취소 위기에 처했지만, 실제로 살아 있는 한국어를 술자리에서 많이 배워서 마지막에는 반에서 2등의 한국어 실력을 보여주게 되었고, 1등은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한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어 10개월이 지난 후,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갑자기 비용 관념에 빠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진단은 상상병력 같은 것으로 "지금간에 80%가 손상이 되어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사망 확률이 95%까지 갔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대사관에 연락을 하여 한국으로 와 아들과 함께 호주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한국에 가지 마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떠날 뻔한 내 친구가, 이젠 호주에서 편하게 살기로 했어. 근데 계속 한국 생활이 그리워서 방학 때마다 오고 있더라고.
그래서 2002년 2월부터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했어. 그러면서 우연히 현재 아내와 만나게 됐는데, 밥을 먹고 있는 샘을 보고 귀엽다며 놀랍게도 아내가 먼저 말을 걸었대.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됐어. 2017년에는 세미에게 고백했고,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옷이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아내가 먼저 영어로 말을 걸어서 인상 깊었다고 해. 그 후에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다시 만났을 때부터 매력을 느꼈다고 했어.
그의 아내는… 친언니도 국제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 이렇게 외국인 남성에게 먼저 대시를 할 수 있었던 걸로 생각됩니다. 또한, 샘보다 2살 연상이었지만, 첫 만남에서 샘이 무려 5살이 연상이라고 속여 한참 동안 오빠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일을 찾던 샘은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찾는 방송국 PD가 있다며, 한번 시도해보겠냐고 했습니다.
샘은 이를 수락하면서, 마침내 한국 방송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월드컵 득점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시작해, 이후 사랑과 전쟁, TV 서프라이즈 등 외국인 재연 배우로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던 재연 배우 생활의 회의를 느꼈고, "그냥 한국 생활 접고 호주에 다시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우선 하고 있던 방송을 모두 그만두고, 한국에 있는 외국계사에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시부터 6시까지 컴퓨터 앞에서 늘 똑같은 회사 생활이 지겨워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돌아가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그에게 가장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에 언급한 대로, 그는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한 후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큰 고통 끝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하해를 했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그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세미 고백하길, 한때는 남자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때 가장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내용을 적어 최대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 못된 일이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부모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라고 부탁하셨지만, 모두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계속해서 연락을 주셨지만, 그것도 피해갔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화해하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는 1년 반이나 지나게 된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넌 뭘 해도 우리 아들일 거야. 감옥에 가더라도 우리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되면서, 하나뿐인 아버지인 것, 그리고 부모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한 달 넘게 함께 살았습니다.
그때, 1년 반 만에 만나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버지께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나도 이렇게 사는 거 싫다. 하지만, 이건 바꿀 수 없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들로서의 자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아버지께서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얼마나 실수했는지 정말 미안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와서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평생 마음에 걸립니다. 한 번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에게 보내기엔 부끄러운 욕설이 담긴 편지를 찾아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그 편지를 읽으셨을 때 어떤 기분이신지, 얼마나 상처 받으셨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집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편지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네요.
그 덕분에 제가 이웃한 심각한 우울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와 이별하고 힘겹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개그맨 김준호가 출연하는 쇼를 보면서 한줄기 빛이 들어와서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습니다. 개그공연을 관람하던 중, MC가 그를 무대로 불러서 얼떨결에 그는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즉석 공연을 관객들 앞에서 선보였습니다. 이런 즉석 공연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개그맨 및 피드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개그콘서트에 한 코너에 게스트 출연하게 됩니다. 그 때의 그는 출연 분량이 고작 30초 정도, 대사도 두 마디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방송 2주 뒤, 김준호가 직접 전화로 그를 스카웃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외국인 코미디언 1호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방송을 통해 꾸준하게 사랑받게 됐고, 한국인 아내와 결혼 후 두 아들을 출산한 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며 가장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하여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며, 한국이 그야말로 축복이자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방송에서 샘의 배우자는 현재 미국 이민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미 온 가족의 비자를 받았다고 밝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Sam은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는데 COVID-19 발병이 발생하여 갈지 여부를 결정하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미국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표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Sam은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잘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기 싫어서 못하는 것과 최선을 다해도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Sam은 최선을 다한 후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고 싶은 곳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시도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볼 것이 많고 어린 나이에 너무 한 가지에 집중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슈돌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식을 다른 자식과 비교하는 부모를 자주 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와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육아에 올바른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귀하 또는 귀하의 자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배우는 과정이며 실수를 하거나 경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