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아시나요? 이 말은 보통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살을 언급할 때 많이 사용되며, 그 유래는 옛날 중국 변방에 살던 한 노인의 말이 도망을 가면서 시작됩니다. 이 노인은 자신이 애지중지 기르던 말을 잃어버려 상심이 너무 컸는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말이 어느 날 임신한 상태로 돌아와 말 한 마리가 더 늘어나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한편, 그 당시 노인에게는 늦둥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새롭게 얻은 말을 닫아 떨어져 그만 절름바위가 되고 말았고,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늦둥이 아들이 절름발이가 되자 노인은 또다시 낙심하고 매일 술만 마시며 삶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이 그 나라의 전쟁이 터져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으나, 노인의 아들은 장애가 있어 면제가 되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도 화가 되고,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복은 인생사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배우 박원수도 한때는 온화복은 인생사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배우 박원수도 한때는 온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나 전원일기가 끝난 후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7개월 만에 50억을 벌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낼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박원수는 아직 tv에는 출연하지 못했지만, 나름 연극계에서는 떠오르는 인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연기 선생님이 박원수를 불러 mbc라는 방송국이 생기는데 거기에서 탤런트 1기생을 뽑는다고 하더라. 선생님은 박원수에게 탤런트 시험을 권유했지만, 과거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 응시를 거부했습니다.
그 후 박원수는 몇 차례 사기 혐의로 수감되었지만, 그의 삶은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설이를 대중문화시켜서 공연도 제대로 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화시켜서 우리나라의 품바 각설이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박원수의 삶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며,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삶의 방향성을 찾게 해줍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에게 큰 가치가 있으며, 그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시험에 대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TBC에서 공채 탤런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간 연극만 하던 그도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가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까지 기다리는 데 한참이 걸렸습니다. 결국 자신의 차례가 돌아와 시험을 봤지만, 심사위원들이 배우를 뽑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며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시험을 보라는 권유에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 때 선생님이 "일기생은 특별하다"며 꼭 시험을 보라고 강조한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결국 그는 박은수처럼 MBC 탤런트 시험장으로 향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꽉 찬 시험장에서 다른 지원자들과 경쟁하며 일기 탤런트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냥 실제대로 말하면, 그는 자신이 가장 못생겼고 찌질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원서를 낸 후 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그 때 시험장에는 이미 성공한 영화배우, 탤런트, 모델 등 다양한 인물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그들 사이에서 당당히 1차 합격을 하게 됐습니다. 2차에서는 연기를 보기 때문에, 그는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면접이 있던 날 명동에서 당구를 쳐서 놀다가, 무려 2시간이 지나서야 면접 시간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동에서 인사동까지 뛰어갔는데, 도착했을 때 이미 차례가 지나간 후였습니다. 이미지나 한 사람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는데, 입구에서 늦으면 시험을 보지 못한다는 말에 긴장은 최고조였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서 마지막 순간에 달려들어 시험장에 도착했습니다.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들어갔는데, 심사위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깡패가 왔네"라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르고 끝나고 나서 신문을 보니, 놀랍게도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요즘이 대세가 되면서 미남 미녀가 많아졌지만, 그때는 잘생기고 예쁘면 대중문화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불암처럼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얼굴이 배우를 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은수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약 5년간의 이야기가 있지만… 1980년대, 시골에는 나이든 분들만 남았으며 청년들은 도시로 몰리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네 가슴을 적셔주던 전설적인 드라마 전원일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박원수씨를 잊게 만드는 경이로운 이야기입니다.
박원수씨는 전원일기를 시작할 때, 드라마가 아니라서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연출자와 방송국에서 일용이라는 배역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박원수씨는 일용이라는 배역이 그저 김 회장댁 옆집에 사는 머슴도 아니고 그냥 그런 배역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출자는 이것이 수필드라마라고 밝혔고, 결국 박원수씨는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박원수씨는 전원일기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상했던 것처럼 드라마 초창기에는 뭔가 드라마 같지 않았고 시청자들도 별로 호응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가 바뀌면서 본격적인 드라마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어.
그리고 박원수는 젊었을 때 성격이 달달하고, 드라마 출연을 시작할 때부터 내키지 않아서 제작진들은 박원수가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 처음부터 일용이라는 캐릭터를 언제든지 밀어줄 수 있게 준비해놨어. 하지만 생각과 달리 박원수는 열심히 하고, 시청자들도 이롱이라는 캐릭터를 많이 좋아해줬어.
결국 박원수는 김 회장 때 못지 않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 김 회장 댁은 화목하고 여유로운 대가족의 이상형으로 그려졌는데, 일용이네는 한 부모 가정이었고 소작농 처지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어. 이런 이유 때문에 시청자들은 일용이 캐릭터에 공감해서 많은 지지를 보내줬어.
어쨌든, 박원수는 이롱이라는 캐릭터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 성격이 점점 비슷해지더니, 결국 나중에는 거의 모라일지에 수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사실, 당시 작가가 평상시 박운수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임무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은 가수는 노래 가사 따라가고 배우는 배역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원일기에서의 일용이 역시도 돼지를 키우면 돼지값이 폭락하고, 상추를 키우면 하우스에 불이 나고, 고추 농사를 지으면 폭풍우가 휘몰아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원일기가 끝난 후 박원수의 삶은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만큼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전원일기가 끝나고 얼마 안 돼서 어느 날, 하루는 아는 건물주이니 부업으로 술집을 한번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자, 박은수는 그냥 편한 마음으로 보러 가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400평이나 되고 너무 넓어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러자 건물주인이 월세는 주고 싶은 대로 줘도 되니, 계속해서 해보라고 권유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순진했었고, 이게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사업을 시작했다.
계약을 체결한 후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돈이 계속해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연기만 하다가 술 장사를 시작하면서 아들을 호프집 사장으로 앉혔다. 처음에는 알바생도 없었지만, 가수들이 대여섯 명씩 매일 와서 노래를 부르는 등 격식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돈이 새는 건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그는 단 7개월 만에 현금 50억원을 잃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평생 모은 돈을 모두 날렸고, 술집 문도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레스로 인해 사람을 잡을 정도로 괴로워했는데 어떤 선배가 필리핀에 가자고 하자 그와 함께 필리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또 다른 사람을 소개받게 되었다. 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자신은 술집 하다가 전 재산을 다 잃어서 돈이 하나도 없다며 거절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돈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어차피 자신들 쪽에 1조에서 2조가 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 사람의 청담동 80평짜리 건물에 영화사 사무실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도 이 사람이 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믿고 인테리어를 끝냈는데, 하지만 1년이 넘도록 인테리어비를 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난 박은수가 따지자 그 사람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뿐 돈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인테리어 업자들이 결국 박원수를 고소하게 됩니다. 재판을 받게 되셨군요.
너무 억울하셨을 텐데, 재빠른 변호사와 판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잘 설명하셨지만, 판사가 하는 말이 그래도 박은수 씨가 주머니에 돈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건 잘못이라며 죄를 인정하라고 하셨다는군요. 이와 관련해서 박원수 씨는 "내가 돈 없이 시작한 게 죄라니까 어쨌든 제가 되고 말았다"고 고백하셨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때가 추석 연휴로 5일만에 나오셨는데, 아니면 5시간이면 뭐 해 이미 탤런트 박원수 사기쳤다는 소문이 쫙 났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저 사기꾼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텐데,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발끝이겠지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때는 사기 당해서 전 재산을 다 잃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 또 일이 터졌다는군요.
당시 누가 안성에 예술인촌을 만들겠다고 나보고 조언 좀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웬 젊은 부부라는 남녀가 나타나서 밑에 집을 짓고 있으니까 구경이나 하라고 해서 내려가는 길에 봤는데, 다 빈집이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그들은 집을 홍보하고 카탈로그를 만들어 대신 집을 얻어 사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집도 없이 여관살이를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입주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그 제안이 뒤엉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내 이름이 부동산 사기 연루자로 불리며 뉴스에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제가 아무런 잘못 없이 끌려들어간 일이었고, 나중에는 그 기자를 고소하게 되어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 왔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일을 극복하여 지금의 나 자신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과거의 일들로부터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래도 이 모든 일들은 쉽게 넘길 수 없는 아픔과 상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픔과 상처들이 나를 더욱 강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기사를 쓸 때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자분이 제가 한 말 하나만 듣고 제 기사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자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자분이 저에게 만날 수 있냐고 하셨는데, 저는 친절하게 만나주게 되었어요.
그때, 제가 말한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씀드렸을 뿐이었는데, 기자분은 그것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에게 사과를 해주셨고, 정전 기사를 내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기자분이 저에게 피해를 끼쳐서 정말 죄송하다고 하셨어요. 그때, 저는 기자분을 용서하고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본 결과, 다음날 그 기자분이 내보낸 정정 기사는 검찰에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저에게 말씀드린 대로 전부다 올바른 말씀이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 바람직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나 봅니다. 한편, 제가 사기제보 기사를 낼 때는, 정전기사에 대한 정보를 가장 크게 내보냈었는데, 그것이 조금 작게 적혀있어서 아쉬웠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노력해볼게요!
그는 자신이 여러 번 사기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경험을 언급하며 아직도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배우 박원수의 유명한 과거와는 달리, 그는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최근에는 대지 농장에서 10만원을 받고 일하는 등 현실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이전 일용직 경험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원수는 젊었을 때 성격이 좀 팔팔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매우 협소하게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한 모든 것이 이제는 죄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쉽게 받아들인 것들이 범죄가 되고, 나쁘게 변하고, 이상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게 이유 없이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가 조금 친근한 톤으로 교정해드리겠습니다.
의심하지 않았냐고 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을 믿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냥 바보처럼 살아온 것 같아요. 방송에 나가도 괜찮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기초 생활수급자 지원금으로 살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그 돈이 100만원도 안 되었는데도 우리 집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시장에 가는 날만 기다렸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이 나네요. 연기를 안 한 지 15년이 됐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고, 물론 어디를 가든 이유는 항상 있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살아온 것들이 제 인생에 대한 반성이 되고, 그 아픔과 슬픔이 모두 드라마처럼 코미디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각설이가 딱 제 삶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강력한 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각설이를 대중 문화로 만들어서 공연도 열고, 더 나아가 세계화시켜서 우리나라의 품바 각설이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알리고 싶은게 꿈이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