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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과거를 가진 김추자, 달라진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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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6. 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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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인기 가수 이수미씨가 2021년 9월에 향년 69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떠오르는 김추자님, 정미조님은 1970년대 트로이카로 유명했습니다. 이번 시간은 김추자님의 인생을 추억해보는 시간입니다. 이름이 참 특이하죠. 김추자님은 "이 코를 춤추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이룩한 스가수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추자님은 전방위적으로 전위적인 종합예술인에 가까웠습니다. 가수로만 끝나지 않았죠. 그리고 최근 김추자님의 안타까운 근황도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프로필에 따르면 김추자님은 1951년 1월 2일 춘천시 효자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70세가 되셨습니다. 부모님은 김차공님과 바거지님이십니다.

 


사이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부인 김덕원 선생님은 강원도 홍천에서 기미 독립 운동을 모아 조직하여 1919년 4월 3일 거산 장부를 이끌었습니다. 강원도 내에서 최대 규모인 3000명을 집결시키는 분이신데요. 김추자씨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와 무용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가 창도 잘하고 예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 맺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했습니다. 김추자씨는 학창시절 춘천 문화방송 합창단에서 활동했고 무용학원, 노래학원 등을 다니며 끊임없이 끼를 연마했습니다. 

 

운동도 잘 했는데요.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도 활약했습니다.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다 공부를 잘했는데, 김추자씨도 그랬습니다. 비평준화 시대로 춘천역 오는 동안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김추자 님은 춘천 여중을 거쳐 춘천 여고를 졸업하셨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응원단장으로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김추자 님의 문화 활동으로 인해 춘천 남학생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노래 재능도 천부적으로 타고나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하셨고, 거의 모든 노래를 몇 번 들으면 바로 따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음감 능력이 뛰어났으며, 판소리나 창을 배우지 않아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수심과 판소리를 불러 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으며, 그림도 잘 그리셨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해 미술을 준비하다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셨습니다.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 가수로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가수의 문하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추자 형부와 신중현 매니저가 친한 사이여서 김추자의 노래 실력을 알게 된 형부가 김추자 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김추자 님은 신중현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신중현 님이 바쁘셔서 며칠을 하루 송해 마냥 기다렸다고 합니다. 

 

며칠 후, 신중현 님은 김추자 님의 노래를 들어보고는 처음에는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 곡을 툭 던져 주었는데, 그 중 대비 고 늦기 전에 라는 곡이었습니다. 1969년에 발표된 이 곡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포함한 1집 을 발표하면서 히트했습니다. 그 당시,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하고 반전 히피 문화가 젊은 세계를 풍미하던 시기였습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노래는 그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김춘, 먼곳에, 거짓말이 아 등의 곡을 연속하여 완전 히트 했습니다. 이 중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는 현재 LG 트윈스 응원가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60년대에서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소울 가수였습니다. 김수자 님은 폭발적인 가창력과 파격적인 춤사위로 1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녀의 패션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일단 모래 스타일이 기존 가수들과 달랐습니다.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의 창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김추자님의 노래는 애절하면서도 구성이 지면서도 시원스레 탓해였고, 어두우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이라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음악성이 사이키델릭한 신중현과 만나면서 시너지가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즉, 소울과 사이키델릭이 만나서 혁신적인 예술이 탄생한 것입니다. 

 

김추자님 본인이 말하기로는 자신의 노래는 머리로 생각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합니다. 독특하게 몸을 흔들면서 노래도 같이 흘러 나온다고 해요. 즉, 느낌대로 라는 거죠. 그 당시 할아버지 세대들은 세상 말세라며 고개를 흔들게 하는 섹시댄스였고, 사실 국내 최초의 댄스가수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패션 또한 특이했는데요. 몸에 꽉끼는 바지는 흡사 에어로빅 빠지 내지는 요즘 유행하는 레깅스 같은 것을 입었고, 나팔바지 또한 김추자님의 상징이기도 하죠. 김추자님의 패션은 그 당시 최첨단 패피들의 추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대단히 앞서간 패션으로,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라고 현대 스타일리스트들이 혀를 내두를 기도했습니다. 70년대 이효리라고도 하죠.

김추자님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한 면이 있었고, 불의의 고개를 숙이지 않는 저항 정신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성격이 기의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었는데, 연예인들은 청와대에서 부르면 거절하기가 어려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에서 김추자님에게도 그런 제의가 왔는데...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갑자기 김추자 간첩으로 지목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1971년 노래 "거짓말이야"를 부르다가 김추자씨가 북한과 연락을 취하는 동작을 보였다고 해서 사실관계를 조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굉장한 선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김추자씨의 매니저는 해병대 출신으로,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출신이었습니다. 

 

예능계에서는 주목받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막을만한 체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매니저는 보디가드 겸 매니저 로크를 고용했는데, 매니저와 김추자씨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둘의 대화 중 매니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주병으로 김추자씨의 얼굴을 공격했습니다. 이후 매니저는 김추자씨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김추자씨는 부인하였습니다.


어쨌든 김추자님은 얼굴에 무시무시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 사건으로 무려 백 바늘을 내야 했고, 6번의 성형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한 지 4일 밖에 안 된 상태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고, 약속한 공연장에 나와 무대에 섰습니다. 물론 노래는 못 불렀지만,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는 그녀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보면 김추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한동안 힘든 날들을 보내다가 1974년 '무인도'라는 노래로 재기를 성공했습니다. 아~오~아~아~ 그러나 아직 실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추자님은 일반 담배조차 전혀 못 피우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자 밴드 멤버 중 한 사람이 대마초를 피우면 목소리가 잘 나온다고 적극 추천해서 한 모금 피워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침만 나오고 목이 아프게 되어 더 이상 피울 수 없어서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나중에 수색 과정에서 그때 벌였던 대마초가 나오자 증거라며 그 유명한 1975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가수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죠. 어마어마한 이슈가 된 가수이지만, 그 생명이 너무 짧고 굵게 끝나버린 것입니다. 5년 정도 화려하게 활동하다 억울하게 가수 생명이 끝나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후 1981년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현재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 당시 남편은 김추자님이 가수라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서로의 진심과 화끈함에 반해, 그의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연예계를 떠나게 됩니다. 그 동안 철저하게 주부로 살아왔는데요, 된장과 고추장 담그는 데는 명숙 5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근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김추자씨는 빨래를 하면서 방망이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하며,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친어머니까지 함께 모셨다고 합니다. 남편이 노래를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김추자씨 본인이 노래 하는 것에 자신감을 잃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가정의 올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대까지 다닐 정도로 잘 키운 딸이 아직 늦지 않았다며, 어머니는 김추자씨의 가수 컴백에 대해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2014년, 33년 만에 김추자씨는 63세의 나이로 컴백을 발표하며 콘서트를 개최하고,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현재는 고향인 춘천 인근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있으나,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주변 지인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가수 이수미씨가 지난 9월 2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더해져 김추자씨의 건강악화 서정적인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김추자씨의 완쾌과 다시 한번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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