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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나쁜 성격에도 한국 가요사에 '최고' 가수로 남을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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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6. 3.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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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이 웃음을 위해 과장된 성대모사를 하다가 피해를 많이 본 사람 중에 가요계의 제왕 조용필씨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의 가창력이 최상위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가창력은 그가 피를 토하는듯한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수로서 성공을 거둔 그는 그렇지만 그 자신을 실패한 인생으로 여겼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성미 씨의 실수로 폭로된 말에서 그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용필씨는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화성 최고의 부자였던 집안에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습니다. 형들의 영향으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기타를 즐겨 쳤다고 합니다. 사춘기 때는 비틀즈 등의 음악에 빠져들었습니다.

 


빠져들었지만, 그런데 과거에는 음악하는 것을 딴따라라고 하며 천시하던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를 하여 급기야 아버지가 조용필 씨가 치는 기타를 때려 부숴버리자 아버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 어린 마음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무려 일주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습니다. 

 

겁을 주기 위해서 그 석류 병원이 있는 기름 시장쪽에 일주일 동안은 거기서 혼 상태에 있었죠. 그래도 아버지는 음악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등학생 때 음악을 하기 위해서 가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복한 가정 환경을 버리고 거지 저리 가라는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밤무대를 떠돌면서도 열심히 기타를 연마했습니다. 

 

입소문이 낮아 1968년 미국에서 무대에서 록 밴드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보컬을 맡았던 멤버가 군입대를 하는 바람에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한 흑인의 생일을 맞아 부탁을 받은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 불러줬습니다. 크기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가수가 되기를 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죠. 밥 먹는 시간마다 아끼면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건발을 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도화지를 붙인 다음 건반을 그려 가지고 코드를 짚어가며 소리가 없는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손으로 일일이 따면서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공부가 나중에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만들게 해주었죠. 1971년에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때부터 가창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가수왕 상을 수상하더라도 가수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1972년에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르며 무대에 섰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새 앨범을 발매할 때, '돌아와요 부산항'을 다시 수록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제안자는 돈으로 50만원을 주면 넣겠다고 했지만, 그런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6년 조총연계 제일교포의 모국 방문이 허용되면서, 그 노래는 시대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록 밴드로 출발했지만,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알리게 된 생피는 '동백섬에 마른 하늘엔 날벼락'을 불러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77년부터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면서, 그동안 누적된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인해 음악 활동을 멈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연루된 가수들이 회복하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도 많았지만, 다행히 조용필씨는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충격은 그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용필씨는 이 고난의 시기를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본 TV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 자신의 창법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아픈 목을 소금물로 토하며 달려냈고, 판소리 연습을 하며 창법을 바꾼 것입니다. 원래는 미성이었는데, 이때 전성기 때의 목소리와 창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것을 극복하고 출국할 수 있었습니다.


금지가 풀린 이후 나온 1980년의 조용필 작곡 창밖의 여자는 상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만장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웠으며, 그는 서럽고 외로웠던 무명 시절 10년 만에 완전히 정상궤도에 올랐습니다. 단발머리 역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조용필 씨는 1집부터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데스타가 되었고 꾸준히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언제쯤 조용필 씨의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이야기한 내용에 따르면, "내 아들은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벌어들이는데도 아직까지 집 하나도 없이 전세에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 새 먹는 거 같다. 기자가 한번 알아봐주라고 했다고 해요." 해당 기자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중간에서 돈을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라, 만약 아버지께서 100만원을 벌었다고 하면, 90%는 오디오 장비나 악기 등에 투자하고 해외에서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를 구입하실 거라고 강조하며, 그 결과로 돈이 부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엄청난 오디오 장비를 운송하기 위해 덤프트럭을 2대씩 구입하여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최정상의 자리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투자하실 것이라는 결심을 하셨고, 이는 조용필 씨로 인해 오빠 부대가 만들어지며 우리나라 최초로 조직적인 팬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조용필 씨는 199개 이상의 히트 곡을 가지고 있으며, 남진 씨, 나훈아 씨와 함께 70년대를, 조용필 씨와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입니다. 그의 음반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은 사랑을 몰라"라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모두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며,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령으로 느껴집니다. 1987년, 그는 연말 대상을 거부하며,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더 고차원의 음악을 추구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의 노래는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차를 타면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는 이별을 기획자와 함께한 추억의 사랑으로 마무리했다. 92년부터는 방송 활동을 중단하며 TV 출연을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 콘서트로 주 무대를 옮겼지만, 당시 우리나라 콘서트의 무대 환경은 열악했다. 조명 몇 개와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 

 

그래서 해외 인류 공연들을 전부 공부하며 분석하고 무대 총 감독까지 직접 맡아 모든 열정을 쏟았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들리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 스테이지 등을 구축하기 위해 3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

 


1979년부터 결성된 조용필 씨의 백업 밴드는 최고의 악기와 장비, 대우를 받는 최고의 멤버들로 구성돼 그의 음악은 노래뿐만 아니라 사운드까지도 엄청나다. 젊은 층들도 인정하며, 적절히 편곡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해 세련되게 느껴진다. 그러나 초기 몇 년은 TV에서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다. 그래도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 수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며, 꾸준히 앨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언제 누구에게나 아픔은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일반적인 가수들은 한 장르를 선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팝, 락, 발라드, 트로트 등 여러 장르를 거의 모두 다루며, 심지어 민요와 오페라까지 부릅니다. 더욱 놀랍게도, 대부분의 곡들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실패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음악을 반대하자, 그는 목숨을 걸고라도 음악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파문 때문에 음악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시련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돈을 많이 벌어도 연인에게 무시받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소심한 성격이었습니다. 또한, 언론의 비난에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며 탑스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박지숙씨와의 약혼기간 중 배우 이미숙씨와 염문설씨와 스캔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1984년 극비리에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이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조용필씨는 나중에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혼 후에도 조용필씨는 언제나 음악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결혼 기간 동안 그는 오로지 음악 활동 위주로 행동하여 그의 전 부인을 외롭게 만들었으며 그녀는 "당신 나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같다"는 말을 쓸쓸히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4년 만에 성격 차이라고 하며 합의 이혼했습니다. 

 

이혼 당시 조용필씨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전 부인에게 주었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겁했다. 인기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음악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의 젊은 시절은 음악 때문에 두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도 잘 모르고 돈 개념도 없었지만 오로지 음악만큼은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노래처럼 1992년 밤으로 가는 쇼 방송에 조용필씨는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개그우먼 이성미씨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때 그는 아직 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용필씨가 외로움 때문에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조용필씨의 진짜 속마음을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말해도 되냐고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조용필씨가 술을 마시면 자신의 인생을 실패다, "너는 애라도 있지 않냐?"라고 했다는 것.

 

노래에서는 성공을 했지만 내 인생은 마이너스나 다름이 없다. "난 아무것도 없잖냐. 나의 삶은 실패작이다."라는 것도 있고 심지어 그 당시 조용필씨는 자기에게 또 한 번 결혼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우연히 쇼핑하다가 아기 신발을 보고 너무 이뻐서 사다가 TV 장식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는 얘기까지 했어요.

 

너무너무 이뻐 보이던 그 작은 신발. 더구나 그녀는 전 남편에게 아이까지 보낸 이혼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조용필씨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해주는 엄마 같은 여성이었습니다. 성격 차이로 힘들어하던 전 부인과 달리 안진현씨와는 아주 사이좋게 잘 지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안진현씨는 그가 음악 작업을 할 경우 그의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며 그가 마음껏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해요. 

 

그녀 또한 음악을 공부한 적이 있고 뮤지컬 활동도 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음악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을 이해해 준 것이고 특히 음악이 완전히 미쳐 있는 조용필씨에게 더더욱 좋은 배우자였던 것이죠. 이런 그녀가 지병으로 심장병이 있긴 했지만 결혼 10여년만에 갑자기 황망하게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조용필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고 통곡하다 쓰러지고 말았어요. 자식에 대한 간절한 바른 마저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었는데,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2003년 안진현씨가 세상을 떠나자 무려 10년간 신곡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2013년 19집 앨범에서 내놓은 노래가 바운스였죠. 그대가 돌아서면 눈이 마주칠까 바운스는 나오자마자 젊은 아이돌 가수를 뒤지고 1등을 차지했고, 다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그때 조용필 씨의 나이는 60대,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항상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듣고 분석하며 상처를 극복하고 음악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음악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근황으로는 또 정말 오랜만인 9년만에 신곡을 선보였죠. 찰나와 세렝게티처럼 두 곡 모두 김이나 작사가와 함께 작업했어요.

10대가 된 지금도 음악이 트렌디함을 잃지 않고, 젊고 단단한 목소리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4년 만인 올해 11월~12월에 공연을 하고 내년 말에는 20집 정규 앨범을 발매할 예정입니다. 조용필 씨는 외로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고 생각하니 왠지 짠하네요.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안 될까요? 한편, 조용필 씨는 공식적으로는 88억,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이상의 기부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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