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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당 김재원 아나운서의 돌연 잠적,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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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5. 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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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에도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김주하처럼 뉴스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손석희처럼 토론을 잘하는 일도 있으며, 그리고 흔치 않지만 전현무처럼 예능인보다 더 웃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아나운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하면, 그건 바로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듣는다는 것입니다.

 

아나운서가 말만 잘하면 됐지, 듣기를 잘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주인공 김재원 아나운서는 앞서 얘기한 아나운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따뜻한 마음으로 듣기를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사람으로, 현재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를 통해 우리네 사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도 해줍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과거 '아침마당'을 하차한 후, 반신불수 아버지를 6년간 간호하다 돌아가신 다음, 노래 자랑을 진행하며…

 

돌연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난 뒤, 나는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던 그 날,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내 삶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 2년이 지나던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봤더니 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을 활용하여 더욱 자신감 있게 살아갈 것입니다.

 

했지만 호전이 없어서 다시 조사해 보니, 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방언으로 웅얼거리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예수님을 부르기도 했지만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그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 어린 김재원의 인생에서 어머니가 떠나신 후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우근은 많이 당황하고 방황하게 되었는데, 특히 학창 시절 매 학년 진급할 때마다 반장 엄마가 학부모 모임을 만들어서 집에 전화를 걸면, "엄마 계시니?"라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니요, 안 계신데요"라고 대답하면서 한부모 가족만이 갖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이후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그는 아버지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당시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하고, 항상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마음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때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못했던 게 가장 안타깝고 후회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 김재원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김재원씨는 어릴 적 가난한 집안에서 키워졌습니다. 그는 혼자서 궂은 집안일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일어나서 계란말이를 만들어 아들의 도시락에 넣었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재원씨는 나중에 계란말이가 지겨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아버지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김재원씨가 대학을 마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어 엄마의 소원을 이루어주었습니다. 김재원씨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친구였어요. 당시 책상에 그물 그어놓고 아웅다웅하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교회를 함께 다니며, 서로가 서로를 소개해주며 친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어느 날 김재원은 "애인은 네가 제일 좋아"라며 고백을 하고, 이어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김재원은 아버지의 헌신으로 유학을 가야 했어요. 유학 중에도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 사랑을 나누며 1년간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마침내 유 아내의 방학에 맞춰 결혼을 하고, 미국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1994년 새벽 2시쯤,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는 누가 시차를 잘못 계산해 한밤중에 전화를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재혼아, 내가 아파"라고 말했어요. 그는 아버지가 어떻게든 돌아가시길 바랬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되었어요.

 

아버지께서 "가야겠다"라고 말씀하시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때 알고보니 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것이었고,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를 잘못 놓으신 것 같아 계속 통화 중이었습니다. 이때, 급하게 사촌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가봐달라고 부탁하고, 아버지는 공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아버지께서 아내와 결혼한지 딱 2개월이 된 신혼이었는데,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은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혹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지 10시간이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병상에서 눈물로 아들을 맞이하며, 천만 다행으로 신체의 반쪽이 마비가 되어 거동이 불편해지셨습니다. 결국, 유학생활을 완전히 접고, 이날부터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후부터는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에서 보호자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케어를 하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여주며 걸음마도 가르치는 등 간단한 일들을 대신 하는 등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길어질 것 같아서 장인 장모는 "우리가 아버님을 돌볼 테니 하동공부를 마치고 돌아와라."고 말하며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지던 첫날밤에는 옆에서 지켜주며 밤새워야 했던 분도 장인어른이었습니다. 장인 장모 입장에서는 딸을 시집보내고 단 두 달 만에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그들이 가장 황당했을 텐데, 그들은 오히려 사회를 지원하겠다고 하며 당시 서운한 말씀 한번 안 하셨습니다. 그때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돌봤으며, 밤낮으로 간호하는 등의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병원에서 유일한 낙인인 TV를 보면서 잠시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손범수 아나운서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더니 손을 쫙 뻗으며 "KBS 21기 신입사원을 모집합니다"라고 외치자 그도 모르게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가졌던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는데, 꿈이 좀 과해서 잠시 내려놓았다가 병실에서 우연히 본 모집공고에 한번 해볼까라는 용기가 생겨, 이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낮에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아버지가 주무시면 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장인어른이 일간지를 오려서 그에게 시사상 나르고, 또한 병실 보호자들은 채널 선택권을 그에게 모두 양보하며, 그렇게 의사, 간호사, 보좌, 심지어 환자들의 염원까지 담아 목숨 걸고 공부했더니, 단 두 달 만에 KBS 아나운서 시험을 합격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방송사에 입사했고, 또한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감사합니다. 그의 엔딩 멘트인 '건강하세요'는 시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투병 중에도 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들이 출연하는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방송이 끝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살가운 아들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와 대화를 거의 못했지만, 나중에는 비록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늘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챙기고 정을 나누며 사랑을 표현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지방 발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직장생활과 병간호를 병행하는 것은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무려 6년간을 아버지를 간호하며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긴 병의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셨습니다.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달 동안에도, 병원 간호사 방에서 양복을 입고 출근하시고, 오후에 퇴근하시면 2시간 이상 청량리행 기차를 타시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몇 시간 쪽잠 자신 후, 다시 출근하시는 생활을 1년간이나 반복하셨습니다.

 

발령받으신 이후에는 집에서 5년 정도 아버지를 모셨는데, 그 당시에는 반 근무를 주로 하시고, 마감 뉴스를 보시고, 아침에는 아버지를 보시고, 재활병원을 다녀오시는 일상을 유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실 때는, 저는 평일 아침마당을 대타로 진행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핸드폰을 산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 방송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시고 4일간의 애도 기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침마당 책임 프로듀서가 무리한 부탁을 하셨는데, 토요일 진행을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래자랑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방송을 하면서도 제 마음은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때는 아버지의 병간호가 길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김병의 효자 없나 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6년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어린 시절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지만, 그렇게 떠나실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아버지와 얘기하고 마음을 표현할 거라는 후회를 지금까지도 합니다.

 

만약에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후 KBS 아나운서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입사 후 10년이 지나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들을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재충전도 필요하다 싶어서 2005년 회사의 무급휴가를 내고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 받아 가족들과 함께 돌연 캐나다로 떠나게 됩니다. 이 때, 그는 내가 10년간 방송을 하고 나니 이대로 가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하프 타임을 설정하고 스스로를 충전해서 후반전을 준비하자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회사나 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었고, 그때는 프로그램만 세계를 돌아다니며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는 나의 선택을 회사에서나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그때 초등학생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과감하게 정리하고 떠났다.

 

그리고 퇴직금의 돈을 60대에 쓰는 것보다 40대에 더 효과적으로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부족한 부분은 내가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해서 충당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는 공부는 공부대로, 노동은 노동대로,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순간의 행복을 느꼈다. 1달러의 팁에 소중함도 느끼며,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아들 친구들 집에 배달을 간 적도 많았는데, 아이가 한 번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점이었다.

 

그는 원래 1년만 머물고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2년까지 머물고 돌아오고, 이어서 3년을 머물며 대학 강의도 하면서 박사 논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3년 동안의 경험으로 캐나다에서 가장 밀도 높은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재원은 인생을 나라에 비유하며, 아들의 나라에서 태어나 결혼 후 남편의 나라에 살게 되고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또한 우리 아이가 사춘기 때 말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유전자에 의한 것이지만, 부모의 욕심으로 인해 공유하려는 것이 너무 많아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소통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며, 아버지는 항상 내게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한다. 이렇게 오늘은 별일 없이 밥을 먹고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유독 아이가 말을 길게 하면 "아이가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다시 "어" "아니" "응"으로만 대답하면서 시간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아이가 집에서 너무 말을 안 하니까 아내가 학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다행히 친구들과는 잘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원래 아침마다 휴대폰을 다 내야 하는데 매일 잘 내던 우리 아들이 하루는 내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때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물으니까 아들이 한참 머뭇거리더니 실은 우리 아빠가 오늘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는 날이에요.

 

제가 그 방송을 꼭 보고 싶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뭐랄까 "아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빠가 들어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 아이의 방법대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또한, 한번은 내가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를 캐스팅하신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재원씨가 방송국 밖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있을까?”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사랑의 요청을 하시는 동안은 유흥을 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구제 사역이며, 성직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 느낀 것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내 삶이 정제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나운서라고 하면 말을 조리있게 하고 상대방을 잘 설득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대화는 우리가 서로 공을 주고받는 일이기 때문에 잘 받으려고 조심하고, 또 잘 주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대개 말을 잘한다/못한다고 평가하지만, 각자 고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고, 그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 다 다르게 하는 거입니다. 먼저, 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없고, 저 사람은 나의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통 강의를 할 때는, 소 그림과 통 그림을 사람들한테 보여줍니다. 그러면 일단 웃게 됩니다. 소통이라는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통이 소에게 여물통이 되어줄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이처럼 소환대의 역할을 통이 되어서야 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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