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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은 잘나가다가 갑자기 푸대접 받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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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5. 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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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대가족 시대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므로 예의범절을 잘 숙지할 수 있었으며, 많은 형제들이 있어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의 노동을 보조하고 동생들을 돌봄으로써 자신들도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기회가 부족하고 아이들이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과 같은 상황에서 부모님의 노동을 보조하고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이며, 어릴 때부터 겪은 다양한 경험이 어른이 되어 더 큰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 함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겪지 못한 경험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강한 자신감과 인내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인물은 엄청난 경험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며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박스를 깔고 자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아버지는 사실 살아계셨지만, 그 후 진짜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때 만루를 찍은 박군은 8살 연상의 누나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1986년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고,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밥을 스스로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눈치를 살렸습니다.

 

우유값 내야 된다든지 학용품 사야 된다든지 하면, 엄마한테 "이거 사줘" 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특히 팔레트 물감 같은 학용품은 2만원 이상이라서, 사실상 불가능했고 말도 못했었어. 근데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이런 거 모르고 그냥 말만 해서 준비물도 안 챙기면 "말썽쟁이"로 생각하고 혼을 내면서 괴롭혔지.

 

그래서 어린 나는 서러운 마음에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 신문 배달 일을 시작했어. 한 달에 5만원을 받아서 필요한 학용품을 사기도 했어.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어. 근데 일정치 않은 수입으로 생활이 힘들었고, 냉장고도 없어서 늘 꺼내 먹는 반찬 밖에 없었어.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이 되서야 처음으로 냉장고를 쓸 수 있게 됐어. 그때는 사실 반찬도 없어서 김치만 먹었었는데…

 

그는 당시 냉장고를 사기 전 여름에 김치 위에 흰 곰팡이가 생겨나면 그것을 걷어내고 라면에 넣어 먹기도 하고 씻어서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며 얘기했습니다.

 

아무튼 이후에도 셋방 사리를 전전하며 어렵게 살다보니 하루는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외삼촌이 같이 살자고 해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러나 당시 외할아버지가 약주를 좋아하셔서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두 사람을 밖으로 쫓아내곤 했습니다. 이 때를 그가 자신감 있게 고백했습니다. 좀 부끄러운 얘기이긴 한데, 지금도 그 때 매우 두려웠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주사가 심해져 엄마와 그가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양다리 밑이나 경부고속도로 남천다리 밑에 종이박스를 깔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잤다고 합니다. 차량이 계속 지나다니며 밤새도록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갈 곳이 없어서 밤새도록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했다는 기억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루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께서는 약주를 마시고 난리를 치시면 마당에서 이불을 깔아 잠을 자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는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박군은 3개월간 할아버지의 병원 간호를 맡게 되었고, 2년 뒤에는 삼촌마저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어 삼촌의 간호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삼촌이 보험이 없었기 때문에 밥값이 비싸서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서 주곤 했고, 박군은 병원 버스를 타고 가서 도시락을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삼촌의 대소변을 갈아주고 씻겨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었을 때 박군은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박군에게 가장 큰 시련과 고비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말기 암 판정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동네 병원에 갔더니 치료하면 괜찮다고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상태가 점점 나빠졌고, 결국 대학병원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지만, 그것조차도 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진짜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11시간 반의 대수술 후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병원에 가서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는 학교에 가기를 반복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며, 배달 알바를 하며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태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만 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당부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졸업까지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끈기와 열정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2 때 학교에서 장학금 나온다는 소식 듣고 이름도 롯데 장학금이라고 해서 도전정신으로 급하게 공부 시작했다. 배달 일 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20층 딱 눌러놓고 올라가면서 공부하고, 오토바이 타면서 복습하고 부족한 부분은 새벽 4시까지 공부하며 2시간 자고 학교 갔다.

 

인문계였으면 일 하면서 장학금 받는 거 어려웠을 텐데, 다행히도 실업계였으니까 도전할 만하다 싶어서 수속 4번 다 받았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님이 우리 학교 선배 중 한 분이셨다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런 나, 기특한 내가 당시 선생님이 종교 회장에도 출마하라고 하셨는데, 사실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학교 마치면 중국집 알바에서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는 신경을 못 쓸 것 같아서 거절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끝까지 하라고 해서 나갔다가 결국 종교 회장도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님께는 학생회장 소식과 자금을 싹 다 들었었는데, 어머니가 많이 우시더라고요.

 

왜냐하면 힘든 상황 속에서 공부는 안 해도 되니까 학교는 졸업만 하라고 하셨는데, 어쨌든 아들이 이렇게 하니까 아마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는 대학교는 생각지도 않았다가 당시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1학기만 지원해주는 걸로, 2학기부터는 돈을 내라고 하자 "이건 아니다" 싶어 대학교는 맛만 보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관두고 여느 때처럼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터미널에 배달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특전사 모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스터를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군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에만 눈길이 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박군은 군대에 가야 한다면 여기서 4년 3개월을 근무해서 나갈 때 목돈을 들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지원했습니다. 특전사인지 특수부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20살의 나이로 특전사에 입대했어요. 군에서는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을 보여주며, 후배들의 존경심과 선배들의 존중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1년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무렵, 그녀는 7년간 몸을 버티다 결국 아들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머니가 15살 때 말기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녀는 어렵더라도 아들을 위해 7년을 더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훌륭한 직업군인이 되었으며, 어머니께서 항상 그를 지켜봐주신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같다. 하지만 이젠 조금 더 자릴 잡아줄 동료들이 있으니 아들이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몸이 안 좋으시면서도 자꾸 면회를 왔다는데, 그때는 오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후회가 된다. 차라리 "어머니, 보고 싶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한 번이라도 어머니를 봤을 텐데... 아무튼,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살아가기로 했다. 부대에서 가족 같이 배려하고 위로해 준 것이 큰 감동을 주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15년간 특전사에서 장기복무를 하며 의리를 지켰다. 한편, 부대에서 노래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행사가 있으면 늘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불렀고, 주말에는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러들이는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수가 된다는 막연한 꿈을 꾸게 되었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트로트 곡 한 잔해를 부를 가수를 뽑는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말이나 개인 시간을 활용해 연습한 뒤 영상을 제출했더니 기적적으로 합격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생활 15년차라 4년만 더 생활하면 전역 후 평생 동안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가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에서도 더 힘들다는 연예계를 왜 굳이 발을 들이라고 권유하느냐며 대부분 반대를 했습니다.

 

선배들은 쓴소리를, 후배들은 아쉬움에 하소요를 하며 그의 가수 데뷔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 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자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15년간 쌓아온 군인 경력과 함께 가수의 꿈을 이루기로 결심했습니다.

 

박근혜는 자신의 꿈을 위해 평생 동안 나올 연금까지 포기하고 가수로 데뷔하였습니다. 한 잔의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대비한 그는 이후 나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박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20년 SBS 트롯신에 출연하면서 그는 자신의 얼굴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근혜의 노래는 물론이고,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이 덩달아 화제가 되어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이후 박근혜는 괴물 시즌이라 불리며 수많은 광고와 방송사들의 섭외를 받아 트롯맨에 이어 가장 잘나가는 남자 트로트 가수가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성기를 맞이한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습니다. 이제 박근혜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는 8살 연상의 동료 가수 한영입니다. 우리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연을 맺고 선후배 관계에서 조언을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의 호감은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귀는 동안에도 소소한 이벤트로 저번에 프로포즈를 했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박군이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한영에게 청혼하여 두 사람은 미래를 함께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겠다는 박군의 선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혼 소식을 발표한 후에도 팬들의 배려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저는 당당하게 자신의 결정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돌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박군에 온라인 커뮤니티인 바꾼 갤러리 측도 그의 갑작스런 결혼 발표로 실망했다며 갤러리 폐쇄시점과 더불어 그간 갤러리를 갈래해온 매니저가 작성했던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때 바꾸는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SNS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팬분들께 제일 먼저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열애설 기사가 먼저 나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어서 팬카페에 그를 바로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셨을 팬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기쁜 일도 있으면 슬픈 일도 있는 법인지,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리기 3주 전에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이 아프다는 전화로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바랍니다.

 

먼저, 아버지를 잃으신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여러 방송을 통해 이야기를 하셨으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결혼 3주 전쯤, 관공서에서 연락이 와 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으시니 빨리 오셔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연락이 오랜 기간 없었던 것도 있어서 매우 놀랐고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지만, 다행히도 아내가 제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아버지를 보러 내려갔는데 당시 아버지는 아미이지만, 1년 가까이 수술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온몸에 전이가 생겨 원래 연세보다 20년은 더 늙어 보이더군요. 결국 결혼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동안 혼자서 외롭고 쓸쓸하게 아파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아내를 붙잡고 많이 울었습니다. 만약 더 일찍 연락을 받았더라면, 같이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그저 안타깝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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