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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근에 밝혀진 전국노래자랑 김신영 충격적인 이야기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20억 대체 왜 썼을까요?

스타

by Mr.속보 2023. 5. 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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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한 배우가 청룡영화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다보면 가장 어렵고 무서운 건 편견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은 평균을 먼저 깨주시고 선입견에 방패처럼 제압해 주셨습니다. 대신해서 소감을 전하겠다고 말한 건 세계적인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시상을 대리로 수상한 코미디언 김신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최근 한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까지 받으며, 연기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찬욱 감독은 "확신을 갖고 캐스팅 했는데, 정말 타고났더라. 평생 연계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고 뉘앙스를 아주 잘 살리며, 그녀가 나오는 연기를 볼 때마다 흐뭇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김신영을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입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거나, 잘못 판단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았고, 그 결과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5년간 치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는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의 일부분이다. 김신영은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가정이 가난해져서 이사를 60번을 옮겨다녀야 했고,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는 8번의 전학을 갔다. 이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판자촌에 살던 시절 잠을 자다 꿈에서 누군가가 계속 물을 뿌리는 꿈을 꾸었을 때였다. 깨어나서 보니, 비바람이 분다 보니 지붕의 나무판이 비를 맞고 있었다. 판잣집은 벽이 너무 얇아서, 옆집에서 기침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러다 어느 날 옆집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그날은 심하게 다퉜는지 벽을 뚫고 김신영의 집까지 넘어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집마저도 월세 낼 돈이 없어서 계속 밀리다 보니, 당시 가족들이 짐노다 못생긴 채 결국 야반도수까지 하게 됐습니다. 물론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본인이 성공한 뒤에 그때 못냈던 월세를 직접 찾아가서 전부 갚아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고, 당시 어린 김신영은 한 번은 목포에 사는 외할머니와 살다가, 또 한 번은 경북 청도에 사는 친할머니와도 함께 살며, 이때 두 할머니로부터 훗날 그녀의 개인기가 되는 할머니 말투와 사투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녀가 꿋꿋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 부족하더라도 할머니의 사랑과, 특히 이웃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린 김신영이 힘들게 지낸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종종 그녀에게 "밥 먹었니? 이것 좀 먹어봐라"며 밥을 대접해주었습니다.

 

빵이나 찌개 같은 음식을 가져다 주곤 했는데, 특히 꼬치집 아줌마는 신형아가 가만히 있어도 불구하고 항상 챙겨주곤 했다. 그런데 어떤 날 신형아가 가만히 있어서 그녀가 자존심 상해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닭꼬치를 주며 고추를 줬다. 또 다른 가연동 슈퍼 아줌마는 신현아에게 우유를 주면서 "키 좀 커져라"고 말해주며 새우유를 돈도 받지 않고 주었다.

 

가사도 주고, 심지어 쌀까지 주면서 "야, 나중에 다 갚아야 돼"라고 장난치며 어린 김신영이 부담 갖지 않게 도와주곤 했다. 참고로 가연동 슈퍼 아줌마는 훗날 그녀가 개그맨이 되고 나서 찾아갔더니 보자마자 펑펑 우시면서 "내가 너 상 받는 거 봤다. TV에 나올 때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며 그녀를 반겼다.

 

그때 김신영이 슈퍼에 있는 물건들을 박스 채로 구입해 스텝들에게 나눠주면서 "가품가 아니에요. 아직 덜 갚았어요. 올해 사셔야 제가 다 갚을 수 있어요"라고 하며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갔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 당시 그녀의 가정 상황은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던 중, 학창시절에는 관심도 없던 유도부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로는 집에서 자는 것보다는 운동부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성장기에 감수성이 예민할 때,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친구들 앞에서 가난으로 인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교내 방송으로 김신영 교무실로 불러와 친구들이 "야, 신형이 또 육성에 못난 남아라고" 하며 비웃었습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육성회비를 못낸 아이들이 여러 명 불려와 망신을 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자기 동생들로, 육성회비 때문에 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 김신영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친구들을 웃게 만들었던 그녀의 개그였습니다.

 

내 친구들이 신형이 웃기길래 나도 너무 좋아서 자랑스러웠어. 그리고 내 친구들뿐만 아니라 다른 반 친구들도 내가 웃긴다는 소문을 내면 더 자랑스러웠지. 내일은 뭐해볼까? 선생님 흉내나 내보지, 학창시절에는 오로지 웃길 궁리만 하면서 학교 다녔다고. 그리고 내가 코미디언이 될거라는 확신이 생겨서 학교 오락부장을 독차지했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축제에 참석한 코미디언 박경림을 보러 가서 무대까지 뛰쳐나가서 박경림한테 "나 코미디언이 될거야!" 라고 말을 했어. 그리고 박경림한테 "너는 꼭 코미디언이 돼!" 라고 말을 들었어. 내 꿈을 응원해준 모든 사람들은 내 개그를 좋아했지만, 부모님만은 반대를 했어.

 

당시 그녀의 부모님은 집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길 바라며, 코미디언의 길을 엄격히 반대했습니다. 그녀는 반 강제로 간호학원에 보내졌지만, 단 하루 만에 뛰쳐나온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녀는 개그맨 조세호가 대상을 수상하는 개그콘테스트를 보며, 자막으로 예원에게 코미디 연기학과 모집이 떠오르자, 반드시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모님은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2002년 월드컵이 열리면서, 길거리에서 생수와 야광봉을 팔았으며, 이후에는 공사장에서 벽돌을 날리며, 스스로 힘겹게 800만원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한국대학교의 최초로 생긴 애원대학교 코미디 연기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학과 교수로는 코미디언 이영자씨가 계셨습니다. 이영자씨는 자신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비만 학생들을 불러 식사를 자주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영자씨가 예능에 함께 출연한 김신영씨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요리를 자랑한 일화는 방송에서 자주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김신영씨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는 정선희씨입니다.

 

그 이후로는 김신영씨가 난독증 때문에 라디오에서 시청자들의 사연을 제대로 읽지 못하자, 당시 정선희씨가 난독증으로 고생하던 그녀에게 따뜻한 응원과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했을 때, 정선희씨는 나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50만원을 주시면서 신형아 한 달간 시간을 가져보자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국 그녀는 선배가 주신 돈으로 위인전을 사서 읽었는데,

 

놀랍게도, 이후로는 한 번도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배님의 신뢰와 격려 덕분에 낭독증을 극복하고 정식 라디오 DJ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정선희 선배님은 제 인생의 멘토이자 가르침을 받은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원외대 코미디 학과에 다시 복학한 후, KBS 개그콘테스트에 도전하여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초 만에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친구와 함께 SBS에 다시 한 번 도전했지만, 다시 한 번 몇십 초 만에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심사위원분이 마지막으로 개인기 같은 거 있냐고 물어보셔서, 위기에 처하면 초능력도 생긴다는 말이 맞는지 훗날 그녀가 여러 방송에서 선보였던 눈물 연기 4가지 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1살의 나이로 SBS 7기 공채 개그맨이 된 그녀는 이후, '행님아'라는 코너를 통해 강호동도 웃다가 눈물이 날 정도로 즐겁게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 근데 일반 예능 버라이어티에서는 적응을 잘 못해 한때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당시 행님아로 빵 뜨고 수많은 예능에 불려 나갔는데, 그런데 모든 프로그램들이 두 번 다시 나를 부르지 않더라.

 

왜냐하면 짜여진 코미디와 달리 일반 예능은 자꾸 들이대라고 하는데도 어느 타이밍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고, 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나 내가 이런 말을 받아 쳤다가 상대가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하는 소심증이 도져서 진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리고 이때 감독님들도 "신형아 여기서 웃겨야지 뭐, 하니네 캐릭터가 아깝다고 하자" 라고 하면서 더욱 기가 꺾여서 공황상태가 되기도 했었어.

 

그러다가 하루는 정선희 선배의 프로에 나갔다가 선배가 워낙에 잘 받아주고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그때부터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아무튼 이후 본인의 뚱보 캐릭터를 앞세워 예능에서도 완벽히 적응을 하며 좋은 성과를 거둬냈지!

 

찾아가 검진을 받았더니 초고도 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그녀에게 신영 씨는 10년 뒤에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라고 물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얘기했더니 그녀는 몸 상태가 현재와 같이 유지된다면 10년 뒤에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러한 의사의 진단으로 인해 그녀는 이전에 뚱보 캐릭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결국 체계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30km 이상의 감량을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살을 빼게 되면서 발생한 문제들로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들과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김신영은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오랜 기간 동안 집에서 칩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공황장애를 경험하게 되며, 매우 어두운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어두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쾌한 장난을 치는 것을 통해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방송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존중하며 버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외모에만 신경쓰고 생각하지 않는세상은 외모에만 신경쓰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김신영은 살을 빼지 못한다는 악플에 시달렸대. 그리고 다이어트를 선언하자 연예인 동료들도 놀려댔대. 업체들도 그녀의 다이어트를 반대하고 20억원을 제시한 광고 제안도 거절했대.

 

그런데 그녀는 건강을 위해 살을 빼고, 결국 성공했어. 그래서 광고 제안도 엄청 받았대. 그런데 갑작스럽게 달라진 모습에 생각지도 못한 조롱과 악플이 쏟아졌어. 그러다가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방송 활동을 접고 집에서 5년간 칩거 생활을 했대. 그런데 어느날 그녀는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 차리기 시작했어.

 

그래서 일부러 유쾌한 장난을 치기 시작하고, 그 결과로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대. 최종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코미디언이라는 꿈을 쫓아가며 방송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도 어쩌면 외모에만 신경쓰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금액을 합친 결과는 무려 20억원에 이르며, 이와 관련하여 그녀는 자신이 10년간 살을 빼며 유지했으며, 이 기간 동안 유혹을 많이 당했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비포 애프터를 확실히 보여주는 광고와 전체 광고 대행사의 광고료를 합하면 20억원 정도의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자신감 있게 전했습니다.

 

이는 대행사들이 자신들과 함께 한 만큼 광고를 하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거부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건강을 위해 살을 빼고, 갑작스럽게 변한 모습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비난과 악플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이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어 방송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5년간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자신의 공황장애가 매우 심해서 5년간 집에서 생활했으며, 어둠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모르게 되었다고 자신감 있게 고백했습니다. 이때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하면 내가 너무 아파서 거절했었는데, 그런 면전에다가 요즘 TV에도 잘 안 나오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네라고 하며 나를 욕하더라.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나는 계속 어두워지기만 하다가, 하루는 문득 "이렇게 살다간 큰일 나겠다" 한 번 있는 인생인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 무조건 유쾌하게 지내보자는 생각으로, 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먼저 전화도 걸어보고, 그리고 전화할 때도 괜히 민망하니까 "키즈쇼입니다" 라고 하면 장난을 쳤는데, 그러다 보니까 신기하게도 진짜 사람이 유쾌해지더라.

 

그래서 이후부터는 일부러라도 밝았던 시절처럼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특히 이때 우리 매니저와 장난을 많이 쳤는데, 매니저가 누구보다 나의 상태를 잘 알고, 내가 치는 장난을 너무 잘 받아줬다. 그러다보니 나도 서서히 밝아지면서, 방송도 하나둘 다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한없이 깊은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벗어날 수 있었던 운동력으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실 유쾌한 장난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신영 씨는 고백하셨습니다. "나는 7살 때부터 꿈이 코미디언이었다. 그래서 이게 내 길인 것 같다. 쭉 갔는데 그런데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만약 내가 직장인이었다면 회사를 옮기거나 이직을 하거나 그랬을 텐데, 하지만 나는 방송 일을 하다보니 이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셀럽파이브라는 그룹을 하면서 그제서야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내가 작사를 하고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아 나는 이런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이거를 내가 늦게 파악했다.

 

사실 내가 마냥 밝은 사람이 아니다. 낫도 많이 가리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칠 때는 나도 많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준 나를 위해 박수 치고 싶다. 요즘에 속된 말로 존버가 있다. 존중하면서 버텨보자. 존중하며 버티는 것이 답이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의 인생도 잘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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