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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배우의 아내에 대한 충격적인 행동, 정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사건이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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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5. 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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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 가장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바로 아내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대부분은 잠깐의 인연이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인데, 그런데 아내는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오직 한 사람으로 가장 긴 시간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또한, 아내는 '아내해'라는 말로써 즉, 내 안에 있는 해, 내 가슴에 있는 태양이라는 의미로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인데요.

 

오늘의 주인공 이상민 역시 첫인상이 재수 없다고 고백한 아내를 굶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가스비 낼 돈조차 없어 딸의 탄생이 부담스러워 식은땀을 흘리고, 그때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여전히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배우 이승민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68년 경북 봉화군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난 이성미는 어린 시절 연기자로서의 소질이 전혀 없다가 고등학교 때 단체 관람으로 본 연극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3 때 대학 원서를 쓸 무렵, 시골 마을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연극영화과를 가겠다고 원서를 내자 교무실에서는 난리가 나, 당시 담임선생님이 "한다는 말이 선생님들 야가 연극 야간답니다.

 

네가 인마이? 학교 개교일이 처음이야"라고 하며, 이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로부터 속된 말로 개망신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배우의 꿈을 반대했던 것은 비단 학교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당시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주말에 명화를 항상 나오던 그의 아버지조차, 그를 불러 한다는 말이 "너가 연기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는 아니다.

 

차라리 공부를 더해서 좋은 대학 다시 가라. 그리고 용돈 줄 테니 여행이라도 다녀오고"라고 하며, 면전에서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경북 봉화 시골 소년 이성민은 주위에서 말이 안 되는 꿈을 꾸고, 배우로서의 꿈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강한 반대로, 나는 내가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릴 적부터 꿈꾸던 배우의 꿈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그와 관련해 그가 말하기를 "사실 환경이라는 게 있다. 어지간한 동네에서 배우를 한다고 해도, 나는 동네 최초였고 당시 우리 동네에서 배우를 한다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선생님들도 얼마나 무시하던 그는, 세월이 흘러 하루는 자신이 처음 듣는 낯선 교장 선생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께서는 모교를 빛내주셔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이후, 배우를 포기하고 재수를 하던 그는 어느 날 인근 축제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탔던 버스의 문이 열리자마자, 정말 신기하게도 연극 단원 모집이라는 포스터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포스터를 살펴보니, 그 위에는 "연극 연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당시 속으로는, "이 시골에 이런 게 있었나?" 하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는 한번 시도해 보자며 생각하던 배우의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이후 그는 재수생이지만 결국 배우의 길로 돌아서기 위해 그 극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집에서는 공부를 포기한 채 극단 생활에 매진하며 선배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생애 첫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살에 한 경험이 지금까지 배우로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밀한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의 공부 상황을 확인하러 독서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독서실 사감이 그의 공부 상황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 셔터를 열고 들어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그의 이중 생활을 폭로합니다. 결국 어머니는 이성민을 불러 "요즘 대체 뭐하니?"라며 추궁하자 솔직하게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 기회도 알게 되면서 집안이 난리가 나게 됩니다. 심지어 이때는 고모까지 찾아와 "절대 연극하면 안 된다" 하지 말라며 그의 연극 생활을 끝내게 합니다.

 

결국 마지막 공연까지만 하고 군대에 입대해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영국 생활에서 느꼈던 강렬한 감동과 꿈을 계속해서 불태우게 되고, 그런데 마침 영국에서 연극을 하던 한 선배가 대구로 오자 담배값과 밥은 먹이겠다는 조언을 듣고, 전역한지 일주일 만에 단돈 7만원을 들고 더 큰 세계에서 연극을 하겠다는 꿈을 키웁니다. 이것이 1991년입니다.

 

결국 나는 대구로 향했다. 시골에서 보던 연극과는 너무도 달라 연극 같지도 않은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그러나 선배님의 밥 사주겠다는 약속은 거짓으로 밝혀져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나는 도움을 청할 친구도 없었고, 돈도 없이 대구라는 낯선 곳에서 혼자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지켜보며 보냈고, 나는 그저 베개를 끌어안고 많이 울면서 버텼습니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주위를 둘러보니 커피 크리머가 보였다. 끓는 물에 녹이고 남은 마가린과 설탕을 부어서 먹었습니다. 그날 내가 먹은 음식은 내 인생에서 먹어본 음식 중 최악이었다. 

 

그만큼 배고픔이 절실했다. 또 어떤 날은 떡볶이를 천 원에 샀는데 떡이 많지 않아서 국물을 더 달라고 했어요. 나는 마침내 배가 부를 때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수프를 요구했습니다.

밤새 복통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놀랍게도 이후 그의 고백에 따르면 아내의 첫인상은 상당히 안타까웠다. 당시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에 안무가가 필요해 친구의 소개로 무용수인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가 사무실에 찾아와 갑자기 맡겨진 물건을 넘겨달라고 하자 의심이 많고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매일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그가 다쳤을 때 그를 걱정했으며 밤늦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녀는 단지 댄스비를 원했을 뿐이야. 이제 비용을 지불할 때야." 하지만 아내의 안무비는 극장에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기로 하고 아내를 불러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답을 채워보려고 하는데 아내가 자주 연락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때부터 첫인상을 갖고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다. 하지만 저는 형편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조건으로 사귀고 결혼 이야기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1년이 지나 아내가 다시 결혼 얘기를 꺼내며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자고 했다. 

 

결혼을 못한다고 말했지만 우유부단한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단호하고 리더십이 강해서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반대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도움을 청한다. 부모님께 미리 제 상황과 수입이 얼마인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말씀드리고 도와주세요.

 

장인 장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연극 배우이며 앞으로도 계속 배우를 할 예정이다는 등의 이야기를 미리 다 했습니다. 결국 나는 잡혀들어가 평소 극단에서 맨발에 거지처럼 살았던 그를 처갓집 앞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은 뒤 사과 한 박스를 사들고, 마침내 처갓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갓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자, 이성미는 딴 것은 하지 않고 나를 보며 굶기게 하겠다는 말만 했습니다. 당황한 나는 굶기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이성미는 결혼을 승낙하며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이성미는 나를 굶기 시작했고, 심지어 당시 가스비를 낼 돈조차 없어서 장인어른의 카드로 결제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어른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으며, 출간된 딸의 집에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배우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장인어른을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님께 집을 보여드리면서 뭔가 기분이 묘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그가 앞서 연애할 때 조건을 걸었듯이 결혼할 때도 아기는 당분간 갖지 말자는 조건을 걸었었습니다.

 

그렇게 당시 그는 단칸방 신혼생활에 그 방조차 얻을 돈이 없어 겨우겨우 보증금을 간신히 구했기 때문에, 형편이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안정적일 때 아기를 갖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신혼여행에서 덜컥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때, 그가 아내에게 참 미안한게 안 굶기겠다고 하고 굶기고 악의 안 가지겠다고 하며 바로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딸에게도 미안하지만 솔직히 임신 소식을 듣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데, 난생 처음으로 느꼈던 두려움이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이 살면서

 

결혼까지 한 것도 부담스러웠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면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임신 소식을 듣고 기쁘다는 반면,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없는 살림의 아내가 임신까지 한다는 사실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배우로서 승부를 걸어봐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인 35살에 서울로 상경해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내와 딸은 대구의 둔채에서 홀로 생활하였는데, 가족들에게는 딱 3년만 도전해보겠다고 약속하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에 내려오는 기러기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아내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대신, 오히려 본인이 10만원씩 용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기름값과 담배값을 받았을 때 가장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때 서울에서 동대구역까지 버스를 타고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에서 상경할 때는 KTX를 타고 딸의 얼굴을 1분이라도 더 바라보곤 했다. 그는 어떤 상황이 닥칠지 전혀 모르는 매우 불안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로에서 공연하던 연극이 갑자기 취소되면 돈을 벌기 위해 대리운전을 할 택시 회사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약속한 3년을 가족과 함께 보냈지만 아쉽게도 바라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잠시 대구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골 출신의 재능 있는 배우라도 연기력만 뛰어나면 국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얻었고, 시골 후배 배우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었다. 그 결과 서울에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가족들도 그의 뜻을 믿고 함께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딸이 서울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는데 고기 사줄 형편이 안되서 1500원짜리 대패삼겹살을 사주는데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이날 이후 대패 삼겹살은 절대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생활이 너무 어려워 보증금 2천만원짜리 집에서 500만원은 생활비를 쓰려고 어쩔 수 없이 1500만원짜리 집으로 다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연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2층이었는데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를 위해서 밝게 가야지 마음먹고 계단을 탁탁탁 힘차게 밟고 들어갔더니 아내가 등을 돌리고 싱크대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왔는데 밝은 척을 하며 집이 넓고 좋네 괜찮네 뭐라고 했지만, 아내가 반응이 없어서 차츰 기운이 떨어졌습니다.

 

사람이 왔는데 좀 돌아보고 해야지 하는 순간, 아내가 돌아보는데 싱크대를 닦으면서 울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그에게 "연기 그만두면 안 돼"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2004년 한 영화의 건달력으로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 이때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배우 선원주가 그를 추천하면서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됩니다.

 

이후근은 수많은 작품에서 신들린 연기를 보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 후에도, 과거 아내를 워낙에 고생시킨 전적에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미안해하며 잡혀 살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내가 영화 공작으로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까지 밟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도 같이 갔었다.

 

그리고 거기는 드레스 코드가 있어서...” 평소에 치마를 잘 입지 않는 아내는 새 옷을 사게 되어 신이 나서 일주일 동안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또 하나, 백상대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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