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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의 파란만장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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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속보 2023. 6. 2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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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의 선구자 가수 심수봉씨는 뛰어난 능력으로 아티스트 경지를 받았으나, 자신의 인생은 외로움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을 입원시킨 어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세 차례의 결혼 등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나무위키나 기사 블로그 등과는 다르며, 모든 내용은 방송에서 심수봉씨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심수봉씨는 1955년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심수봉씨가 3살 때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쪽 집안은 4대째 내려오는 국악 명문가로 인간 문화재도 몇 분 계시며, 140여개의 음반을 낸 민소각의 바흐지반이라는 가문에 태어난 심수봉씨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다섯 살 된 수봉을 데리고 동네 의사와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가 처녀를 데리고 새장가를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혼 후 서울로 이사한 어머니는 험한 행설에 나섰고, 어느 날 딸과 함께 다방에 갔을 때 어머니가 문전박대 당하는 모습을 본 일도 있습니다.


어린 딸을 두고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나쁘게 나타나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병명도 생소한 뇌신경 인플레라는 병이었는데, 신경이 매우 약해 큰 소리나 언어에 치명적이라고 한다. 언어를 듣는 것 만으로 눈에 피가 터져 실명이 될 뻔하여 수술까지 받았다. 15살 때 인천 근처의 섬에서 수개월간 요양을 받은 적도 있다. 지금도 그 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게 되니 대신 음악에 푹 빠졌다. 여러 종류의 악기를 연습하고 화성학을 독학하면서 대학 진학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그녀는 미8군에서 활동하는 드럼 그룹에 참여하여 드럼을 연주하였다. 상상할 수 없겠지만, 심수봉 씨처럼 드럼을 연주하게 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는 타고난 음악 재능 때문이다. 엄마는 그 지역에서 배울 수 있는 피아노 학원을 찾아서 멀고 먼 길을 걸어서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그 후에 거의 모든 악기를 배웠다. 그녀는 드럼뿐만 아니라 색소폰까지 연주하면서 돈을 벌어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와는 안 어울리게 명지대 경영학 전공을 선택했는데, 그녀는 가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가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학을 가서 피아노로 공부할 생각이었지만, 어느 날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알바를 할 때, 나훈아 님이 그곳을 방문하셨다. 그녀는 센스 있게 나훈아 님을 대접하여 나훈아 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그녀는 트로트를 부르며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잘 부르는 거죠, 사람을 홀리는 음성으로 나훈아 씨가 깜짝 놀라 듣더니 잠시 뒤에 나가셨습니다. 그 다음에 음반 기획사 사장 둘을 데리고 오셨어요. 그리고 그녀를 강력 추천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수를 안 하면 누가 가수 하냐고 하면서 그렇게 계약까지 다 했어요. 나훈아 씨는 심수봉 씨를 위해 곡까지 써주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여자입니다" 그런데 좀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나훈아 씨 앗 때 스킨들이 터지자 그와 연락이 끊어진 것입니다. 나훈아 씨가 빠지니까 음반 기획사 사장들의 태도가 달라지더니 그만 흐지부지 되고 말았어요. 그 당시 음반을 입는 것은 집안체가 날아갈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음반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수봉 씨는 5기가 좀 생겼어요. 자기는 원래 가수에 대한 꿈이 없었는데 불씨가 확 당겨졌는데 그만 좌절된 거죠. 

 

그녀는 자기 음반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당시 대학가요제가 휩쓸던 때인데요, 거기에 입사하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때 참가한 사람들이 아주 쟁쟁한데요, 노사연 씨, 배철수 씨, 임백천시 등 거기서 심수봉 씨는 트로트를 불렀어요. 대학가요제 최초의 트롯이었다고 합니다. 청순한 여대생이 피아노를 치자 멋진 팝 스타일의 음악을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트로트가 나오자 다들 놀랬어요. 

 

이때 불렀던 노래가 그때 그 사람 [음악]. 그러나 본선 진출은 했지만 수상을 못하고 떨어졌죠. 당신은 롯과 포크가 유행했던 때이고 대학가요제라 대학생들의 순수함과 패기 이런 것들을 원했는데, 심수봉 씨가 부른 트로트와는 좀 안 맞았던 거죠. 노래 너무 자신있던 심수봉 씨는 오히려 대상을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수봉 씨는 수상을 놓친 후 자존심이 상처받았습니다. 그런데, 음악 녹음에서 수상자를 제치고 가장 먼저 녹음을 했습니다. 지구 레코드 사장은 심수봉 씨의 노래를 듣고 "내가 음반을 낸다면 당신을 바로 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대박을 치며, 그러나 심수봉 씨의 노래는 분홍신처럼 그녀를 너무 무서운 운명으로 끌고 갔습니다. 

 

다음 해, 1979년 10월 26일 대학가요제에 참가한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녀의 노래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에서 열린 술자리에 그녀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죽는 척 했지만 사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수많은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방송 금지를 당했습니다. 그녀는 역사의 피해자였지만, 신군부의 정치탄으로 방송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밤 업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에 나온 노래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84년에는 방송 활동 금지가 풀려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나온 노래가 "남자는 배에, 여자는 항구", "무궁화 사랑밖엔 난 몰라" 등입니다.

 


그대와 함께할 때, 특별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입니다. 대부분의 히트곡에 대해 가사 작사, 작곡 및 노래도 직접합니다. 목소리는 국보급으로 깊은 감정을 담고 있으며, 매우 감미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천재적인 재능을 사랑하는 대중의 열정 덕분에 그녀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 26일 사건 이후 개인적인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그날 밤, 어머니께서 신문에 나오기 전에 그 사건을 들었습니다. 한 달 전, 어머니의 지인들이 심수봉 씨의 죽음이나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그 사람과의 만남을 주도했습니다. 그 사람은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그를 만난 후 그녀는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사건을 겪은 후, 더욱 심리적으로 힘들어졌지만, 그녀는 정신적인 위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며, 그녀는 딸에게 최면을 걸어 딸이 돈을 바치게 한다는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너무 심하게 간섭하고 억압했고, 그 결과 심수봉 씨는 돈을 빼돌리고 어머니에게 반항하고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주요 인자가 되어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26일 동안에도, 저는 자꾸 엄마한테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엄마는 원망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저를 다시 정신병원에 가게 해도, 저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름째 되는 날부터 심수봉 씨는 머리를 써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 시작했어요. 심수봉 씨는 참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몰랐고 엄마에게 잘못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신은 이혼했고 두 사람은 동거를 하며 아이를 가지게 됐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를 낳자마자 보름만에 집을 뛰쳐나왔어요. 이후 또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사업가였습니다. 그 남자는 기자들의 언론 공세를 막아주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녀는 결국 이 남자도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지우고 싶을 정도로 상처 받았습니다. 방송에서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결혼은 6년 만에 파탄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으로 딸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혼하면서 딸을 뺏기다시피 하며 헤어지게 되었지만, 나는 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6살짜리 딸을 보내면서 나는 공항에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딸은 자신을 오해하고 외면했고, 전화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9년이 흐른 어느 날, 초등학생 딸이 유모를 통해 전화했는데, 걸그룹 핑클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걸 기회로 딸과 재회하게 되었고, 중학생 때부터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가 지금의 남편입니다. 심수봉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연출을 맡은 PD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저녁도 챙겨주시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방송이 잘 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비즈니스였는데,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자에게 그녀를 또다시 끌리고 맙니다. 그녀가 평생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세 글자 "아버지", 아버지 부재와 결핍 그리고 호르몬이와 단둘이 외롭게 살았던 그녀는 늘 사랑의 굶주렸죠. 그 남자를 짝사랑할 때 만든 노래가 비나리에요.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이 노래를 듣고 감동한 PD와 1995년 결혼합니다. 

 

남편은 심수봉씨보다 7살 연하였어요. 이제는 행복만이 함께 할 줄 알았으나,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이 새 아빠에게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었어요. 아들과 딸의 방황으로 무려 9년간 남편과 생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정적이고 모범적인 아주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엄격한 아버지였대요. 아이가 엇나갈 정도로 심수봉씨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점이 많았어요. 

 

자신의 불행으로 자녀들도 고통을 받는 것 같아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들과 딸의 돌 사진에 모두 아빠 없이 엄마 심수봉씨만 있는 모습은 너무나 마음 아프네요. 그런 아이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기를 바랬는데, 남편은 조금 심하게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남편도 과거 일로 분노와 상처가 많이 쌓여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풀지 못해 더욱 차가운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너무 힘들어 울고 있는데그때 그녀에게 영혼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이때 그녀는 기독교를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결심합니다. "내 사랑으로 차가운 얼음남자를 녹여주기로. 남편한테 사랑받을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사랑을 주기만을 결심했다고 해요. 그렇게 사랑받을 욕심을 버렸더니 이상하게 엄청 행복해졌어요. 그리고 깨달았대요. 사랑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거라는 걸 말이죠.


그녀는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해지고, 남편이 변화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결국에 진정한 사랑을 찾았고, 남편이 소개해준 심수봉씨가 작사한 러시안 번안곡 '백만송이 장미'의 가사가 그녀의 사랑을 정확히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사랑만을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구해준 경험이 있습니다.

 


심수봉씨는 자신의 어머니와 언제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아이들은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하며, 방황하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심수봉씨는 어머니의 심정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정상급 가수였던 그녀는 한 순간에 심령학자에게 빠져 어머니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평생 외롭고 힘들게 살았음을 알게 되었고, 2013년, 결국 치매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증상이 너무 심각했던 시기, 심수봉씨는 결혼 후 혼자서 어머니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TV를 보면서 혼자 있을 때 슬픔을 느꼈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겉으로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 나 좀 버리지 말아줘, 살려줘, 이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를 붙잡으며 "내가 절대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버리지도 않을 거야. 엄마를 끝까지 책임질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감동적으로 "너무 고마워" 라고 말하며 심수봉씨를 붙잡았습니다. 이후, 심수봉씨와 어머니는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치명적인 환자로, 심각한 정신 상태를 보였습니다. 그녀는 심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모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언제나 부모님을 존중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괄시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돌보았더니 놀랍게도 치매가 치유되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치매는 완치가 안 되는 질환으로 알고 있지만, 그녀의 지극한 사랑이 어머니를 다시 돌아오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2018년에는 4년이 지난 후 "엄마 사랑해요"라는 곡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곡을 발표한 지 1년 후 모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쯤 심수봉씨가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을 때, 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감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남기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엄마 인생이 너무 슬프고 외롭지 않았냐고 딸이 묻자 어머니는 '아니다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내 인생은 외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셨는지 오롯이 느껴지며 정말 뭉클한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심수봉씨가 그 험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처럼 좋은 음악으로 많은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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