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패티김 돌연 은퇴 진짜 이유는 남편 길옥윤과의 비밀 재산?

스타

by Mr.속보 2023. 6. 7. 17:48

본문

반응형

백년에 한 번 나올지도 모르는 불새출의 디바, 패티김씨.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는 음악계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외국 가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우리나라 가요 태동기에는 최초이자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누구보다 도도하고 당당했지만, 그녀의 속은 깊은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일흔 다섯 살에도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그녀. 그런데 갑자기 은퇴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떠난 충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패티김씨의 화려한 인생과 추억을 함께 기억하며, 그녀가 겪었던 아픈 시간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패티김씨는 1938년 서울 출생입니다.


본명은 김혜자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와 이름이 같죠. 아주 부유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머니는 숙명여자 대학교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나온 일본 유학파였어요.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금광을 운영해 부유했는데, 해방 후 신문을 창간하고 사회 학술단체를 이끌다 살림이 어려워졌습니다. 사실 패티김씨는 노래 실력이 타고났어요. 

 

어머니가 18세 꾀꼬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고 목소리가 좋았어요. 환경도 그녀를 도왔죠. 오빠 언니들이 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 종일 음악 속에 파묻혀 지냈다고 해요. 어렸을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불렀지만 고등학교 때 국악을 배우기도 했어요. 그때 목청이 트이고 음악에 대한 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국악으로 콩쿠르에 나가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학교에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통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국악에 빠지면 기생이 된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국악을 포기하죠. 그러나 그녀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다른 장르까지 섭렵하며 더욱 폭넓어졌습니다. 오페라 아리아를 유행가 부르듯이 불렀다고도 해요. 이때 성악 발성을 터득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국악의 꺾임과 성악적인 발성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새가 더욱 기울어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했어요. 

 

보수적인 집안 환경에서 가수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죠. 당시 선망의 직업이던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가 되려고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노래 실력을 아는 오빠 친구가 그녀를 베니 김씨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베니 김씨는 트럼펫 연주자로 기획사 화양을 이끌며 미8군 무대를 장악하던 인물이었어요. 58년 미8군 무대로 데뷔하자마자 바로 스타 등급이었죠. 난다긴다는 가수들 속에서도 탁월한 노래 실력을 가졌습니다.


매력적인 외모로 유명해졌던 패티김씨는 1960년 일본 정부에서 초청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그녀의 큰 키와 육감적인 몸매, 이국적인 외모는 누구에게나 매료되었습니다. 광복 후 한일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시대였습니다. 패티김씨는 키가 작은 일본인들을 압도하기 위해, 더욱 키가 커 보이려고 가장 높은 하이힐을 신고, 더욱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만하거나 도도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습관이 되어버린 자세는 그녀를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엔카라는 일본 전통 가요를 부르지 않고, 한국 노래와 팝송만을 부르며, 의상으로는 한복과 드레스만을 입었습니다.


패티 김씨에게 큰 비용을 들여 기모노를 선물했는데, 그건 그녀가 기모노를 입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그녀는 기모노를 입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어머니께서 그 비싼 옷을 자르고 조각을 놓아 이불을 만들어 버리셨다고 합니다. 패티 김씨는 그 옷을 입고 홍콩, 대만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연을 하다가, 1963년 미국 진출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감을 갖고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었고, 미국에 가기 전에는 작곡가 박춘석씨가 "외국에 나가도, 본국에서 가수가 잊혀지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대히트를 기록하게 되었지만, 인종차별과 후진국으로 인한 부담때문에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두 달간 휴가를 내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유명했던 기록윤씨가 귀국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무대에서 많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두 달 휴가가 끝나고 4월에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패티 김씨에게 기록윤씨는 고글라나 주겠다며, "사울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가사를 보면 그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한 것이죠.


잠이 들면 꿈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죠. 그리고 그 꿈속에서 탄생한 곡이 "사울이 가면"입니다. 이 곡은 4월이 지나면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함께 살던 동거녀가 있었던 가운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습니다. 66년 초에 만난 두 사람은 그의 12월에 결혼을 했고, 패티 김씨는 당시 29살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미국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국내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모험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혼여행지로 전쟁 중인 베트남에 갔는데, 그것도 공연단이 쉽게 갈 수 없는 오지로 파병간 우리나라 군인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몇 차례나 죽을 뻔했다고 하네요. 밑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기체가 흔들리고 추락할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어요.

 


그곳에 가서 무대도 없는 땅바닥에서 서거나 앉아서 군인들의 눈을 마주보며 공연을 했습니다. 군인들도 울고 자기도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그렇게 딱 두 사람만 가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우리나라 파월 장병들에게 타향살이 등을 불러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 그 공연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며 자기가 태어나서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도 했어요. 이렇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부부이었던 두 사람은 결혼 3년 뒤 딸까지 낳았습니다. 또한, 음악적으로 환상적인 파트너였던 그들은 많은 명곡을 함께 작업했어요. "나" 같은 곡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리아씨와 그녀의 연인은 사랑이란 둥근 것이라고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이별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면서 이별을 암시하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실제로 이 노래가 발표된 지 1년 후, 1973년에 이혼하게 되었고, 딸은 패티 김씨가 키우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3년 뒤, 마리아씨는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세관에서는 마리아씨가 가난한 윤씨를 차버리거나, 외국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기록 교실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에 대한 비난으로 마리아씨는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패티 김씨는 무대에서 몇 차례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녀는 이혼 사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기록윤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세월이 흐르고 흘러 기록연씨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또 한참 후에야 패티 김씨는 두 사람이 파경한 비밀을 밝힙니다.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그녀의 이혼 후 35살 때 아름다운 노래로 절정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박춘석씨와 다시 손을 잡고 주옥 같은 명곡들을 쏟아냈는데요. 결혼 생활 동안, 기록윤씨는 패티 김씨에게 자기 노래만 부르게 하고, 다른 작곡가가 곡을 보내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이혼 후에야 다른 작곡가의 곡을 부를 수 있었던 거죠. 이때 나온 노래들이 못 잊혀지는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가시나무새 등입니다. 모두 70년대 중반 이후에 나왔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혼 후 20년 만에 두 사람이 다시 무대에서 만났습니다. 1994년, 기록윤씨는 아무런 투병 중이었는데, 당시 일본에 머물던 그는 국내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당시 SBS 국장이 패티 김씨에게 무대에서 함께할 것을 요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와 완전히 끝난 후 한 번도 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그녀, 기록윤씨가 골수암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서야 수락했습니다. 그녀는 기록윤씨가 원한다면 무슨 노래라도 부르겠다고 말했고, 그 이후에는 동료 가수들의 도움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동 출연까지 챙기며 보는 사람들의 코끝을 찡하게 만든 이날, 패티김씨는 무대에서 기록윤 씨의 노래만 부르며 이별 콘서트를 진행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기록윤 씨에게 "빨리 회복하십시오. 그 뭐 병 같은 거 앓고 그러십니까?"라고 말했고, 그녀는 대법원 척했지만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라는 노래를 부르며 올라선 다른 게스트들과 시청자들도 모두 울고 말았습니다. 기록윤씨는 이런 말로 화답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사울이 가면으로 시작해서, 사랑은 영원히로 끝났다. 그러나 몸만 끝났지, 마음은 영원하다." 곧 일어나서 색소폰을 울고 노래를 부르고 작업을 하겠다며 회복을 자초했지만, 그 다음 해인 1995년 투병 중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위원회는 그녀에게 이별이란 노래를 부르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를 자신이 없다고 거절하고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13년 뒤, 2008년 패티김씨는 무릎팍도사 방송에 출연해서 기록윤씨와 이혼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70대 였습니다.


기록윤씨는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기보다는 1년, 1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또한, 기록윤씨는 1년 내내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으며, 부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록윤씨는 자상한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적, 큰 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친부모와 생리적으로 분리되는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반면, 패티김씨는 전남편의 명예와 딸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가, 끝내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밝혔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재산이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운 삶 무렵 갱년기를 겪으면서, 강인한 그녀조차도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무대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패티김씨에게 수많은 루머가 쏟아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패티김씨 명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주위에 특식을 거리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이전에는 명동에 넓은 무대가 있는 피자집을 운영하다가 잘 되지 않아 사업에서 손해를 봤던 경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보증을 잘못 사용하여 큰 부채를 갚아야 했고, 재산에 큰 손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업 실패와 함께 갱년기 우울증이 찾아왔던 그녀는 기록일 씨와 이혼하고 비난을 받는 등 5일 속에서 힘들어하던 중에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사업가 아르만도 게딩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녀의 팬이 되었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1976년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재혼하여 또 한 명의 딸 카밀라를 낳았습니다. 그녀의 장녀인 최정아 씨와 찬혁 카밀라는 친자매 이상으로 사이가 좋으며 추정되는 새아버지에게도 진심어린 효도를 한다고 합니다. 카밀라는 엄마를 닮아 노래의 소질이 있었으나, 미국에서 자유롭게 살던 그녀는 한국 연예계를 견디지 못하고 가수를 포기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카밀라는 웨딩 디자이너가 되어 현재는 미국에서 달라는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엄마처럼 인간 김혜자를 버려야만 이런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딸은 그러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녀의 엄마는 2012년 은퇴를 발표하고 1년 동안 전국을 돌며 은퇴 공연을 하였으며, 2013년에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75살이었으며, 건강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은퇴를 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태양이 가장 찬란한 때가 태양이 질 때에 석양인데,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 아궁이 방송에서 한 출연자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껴 팬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개인 돈을 쓸 정도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지만, 팬들에게 최고의 목소리를 선보일 수 없다고 판단하자 눈물을 머금고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스탠다드 팝으로 도전장을 내밀어 우리나라 발라드 음악의 초석을 만들었고, 그녀의 노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